기자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때만 해도 미국 팝 음악은 하나의 문화적 기준이었다. 팝 가수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취향을 넘어 감각과 수준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다. 서구 음악을 동경하던 한국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음악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나라가 됐다. BTS를 시작으로 블랙핑크, 트와이스, 스트레이키즈 등 한국 아티스트들은 이제 미국 시장을 넘어 세계 음악 시장에서도 확고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성공이 모든 장벽을 허문 것은 아니었다. 세계 대중음악의 최고 권위를 자처해온 그래미 어워즈는 여전히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4년 전 BTS의 ‘버터’는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100에서 무려 10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미국 음악 시장을 휩쓸었음에도, 그래미는 끝내 BTS에게 트로피를 안기지 않았다.
그랬던 그래미가 올해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했다. 지난달 29일, BTS는 올해 그래미에 새 앨범을 출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멤버 전원은 각자의 SNS에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동일한 입장문을 영어 번역 없이 한국어로만 올렸다. 외신들은 이를 사실상 그래미 보이콧으로 해석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래미 측은 성명을 통해 “아시아 음악을 분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인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새 부문 출품 여부가 본상 후보 자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BTS의 짧은 메시지와 달리 그래미의 설명은 길었고, 오히려 한 가지 질문을 남겼다. 왜 유럽이나 남미 팝 음악 부문은 없는데, 아시아 음악만 별도의 범주로 만들어야 하는가.
BTS의 선택은 그들의 팬덤인 ‘아미’를 넘어 미주 한인과 아시안 이민자 사회에서도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SNS에는 “겉으로는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벽은 그대로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리는 위치가 아니다”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음악계 논쟁이 아닌 미국 사회에서 살아온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인정받기 위한 노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살아온 이민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오랜 시간 중요한 과제였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했고, 더 뛰어난 성과를 보여야 했다. 성공은 단순한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편견을 넘어서는 증명의 과정으로 여겨졌다.
미국 사회에 깊이 들어간 세대라고 해서 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024년 남가주 아시안정의진흥협회(AJSOCAL)와 랜드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서 영어가 유창한 젊은 세대와 이민 2세 이후 세대가 언어 장벽이 있는 이민 1세대보다 아시안 혐오를 더 많이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세대조차 “나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데 왜 여전히 다르게 평가받는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BTS의 선택이 아시안 이민자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해온 이들에게 BTS의 선택은 누군가가 정한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 자체를 질문하는 일이었다.
이제 논점은 아시아 문화가 세계무대에 설 자격이 있느냐가 아니다. 이미 세계가 선택한 문화를 기존 시스템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이다.
세계는 이미 변했다. 이제 변화해야 할 차례는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여전히 과거의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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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경 사회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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