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The Odyssey)가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국내 역대 외화흥행 5위에 오른 이 영화는 글로벌 박스오피스에서도 지금까지 17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 방대한 스케일과 서사, 탁월한 촬영으로 인해 내년도 오스카시상식에서 다수의 주요후보에 오를 것이 확실하다.
개인적으로도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해서 지난 7월, 개봉되자마자 아이맥스 극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영화는 거대한 신화적 서사를 극도의 사실적 톤으로 되살려낸 압도적 걸작이었다.
그런데 원작인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천병희 번역)를 읽고 난 후, 책이 영화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극적이며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제목이 오디세이, 오디세이아, 오뒷세이아, 주인공은 오디세우스, 율리시스 등 조금씩 다르게 표기되는 것은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 영어, 한국어로 번안하면서 생긴 차이다.)
“들려주소서, 무사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로 시작되는 ‘오디세이아’는 전체 24권, 1만2,000행에 달하는 내용이 정교한 운율을 갖춘 운문으로 쓰인 서사시다. 2,700년 전 작품이지만 스토리의 구성과 전개가 놀랍도록 현대적이어서,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귀향과 복수를 시간 순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회상을 교차하며 펼쳐내는 절묘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옛사람들 특유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대사와 표현들이다. 예를 들어 신과 인간들을 묘사할 때면 반드시 그 특징을 알려주는 형용사구가 따라온다.
빛나는 눈의 여신 아테나, 목소리가 멀리 들리는 제우스, 황금 샌들의 헤라, 머리를 곱게 땋은 데메테르, 고운 화관의 퀴테레이아(아프로디테), 황금 화살의 아르테미스, 모든 인간들의 일에 우아함과 영광을 주시는 신들의 사자 헤르메스, 머릿결이 고운 칼립소, 복사뼈가 예쁜 헤베,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오디세우스에 관해서는 열 개도 넘는 수식어가 나온다. 고귀한 오디세우스,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 제우스의 후손이신 오디세우스, 마음이 너그러운 오디세우스, 참을성 많은 오디세우스, 사자의 용기를 가진 남편 오디세우스 등등.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식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포도주에 관한 것이었다. 와인의 역사가 기원전 6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고대그리스 식탁에서 일상적 음료라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은 무척이나 신선한 발견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드러난 당시의 포도주 문화는 식사 때 늘 마셨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도 마셨으며, 포도주에는 반드시 물을 타서 마셨다는 것이다. 또 이때 이미 특정 산지(테루아)의 차이를 알고 있었고, 숙성의 결과도 알았으며, 포도가 익는 순서에 따라 수확의 시기를 달리했음이 표현돼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을 물에 타서 마셨다. 물 타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건강에 해롭고 야만적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책에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희석용 동이’(krater), 와인과 물을 섞는 큰 혼합용기로, 희석 비율은 포도주와 물이 1 대 3 정도였다. 이때의 알코올 농도는 3~8퍼센트로 생맥주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지중해 지역의 포도주는 오늘날의 와인처럼 안정적으로 발효·숙성·병입된 술이 아니었다. 포도주를 장기간 숙성하기 위해 꿀이나 허브, 향신료를 넣기도 했고, 농축해서 진한 형태로 만들어 보관했으니 도수가 높았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이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혔다가 간신히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오디세우스가 사용한 지략이 키클롭스에게 ‘검고 진하며 매우 강한 포도주’를 희석하지 않은 채 마시게 한 것이다. 키클롭스는 “네가 준 것이야말로 가히 암브로시아요, 넥타르로다”라고 감탄하며 석잔을 거푸 마신 후 곯아 떨어졌고, 오디세우스는 곧바로 그의 눈을 찔러 멀게 했다.
로마시대에 와서도 와인을 원액 그대로 마시는 사람은 야만인 취급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식수 사정을 헤아려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상수도 시설이나 정수 시스템이 있었을 리 만무하니, 그들에게 와인은 술의 기능을 넘어 비위생적인 물을 정화시키고, 씁쓸한 물에 맛을 더해주는 음료로 매우 중요했다.
로마 군인들이 유럽 정복에 나섰을 때 주둔하는 곳마다 포도나무를 심었던 이유도 현지의 물을 마실만하게 만들어주는 와인의 조달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역들이 현재 프랑스의 유명 와인산지들이 되었다. 와인은 또한 고향 떠난 군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음료였고, 다친 병사의 상처를 소독해주는 알코올이었으며, 와인에 함유된 미네랄은 부족한 영양소를 채워주는 열량의 보고였다.
호메로스의 와인은 어떤 맛이었을까? 궁금은 하지만 결코 물에 타서 마시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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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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