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그렇게 계획하진 않았는데, 9월초의 서울 방문은 2주 일정이 모두 미술관 투어로 채워졌다. 원래는 서울 아트페어 키아프(Kiaf)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서도호 전, 그리고 남양주시 초청 한미작가교류전을 보고 온다는 소박한 바램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보고 싶은 전시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무려 9개의 전시를 관람하는 즐거운 과욕을 부렸다.
앞의 세 곳 외에 방문했던 미술관들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유영국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솔 르윗 전, 세화미술관의 게오르그 바셀리츠 전, 파주 미메시스 미술관의 젊은 작가 3인전,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과 고궁박물관을 찾았으며, 오랜만에 고궁투어에도 나서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까지 돌아보았으니, 넘치도록 알차고 뿌듯한 여행이었다.
서울은 거의 모든 미술관이 강북 중심에 모여 있어서, 큰 전시여도 하루에 2~3개 정도는 찬찬히 관람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보통 11시에 오픈하므로 일찍 나가 한두 시간 여유 있게 감상한 후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한 곳을 방문해 느긋하게 돌아보아도 시간이 남는다. 또 대부분의 아트 뮤지엄은 건축물이 멋지고, 안팎에 설치된 조각품들도 대단하기 때문에 오랜만에 예술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한적하게 숨 고르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거의 매일, 운동화 신고 나가서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었다. 삼청동에서 북촌으로,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용산으로 남산으로 종로 3가로… 서울거리 구경도 할 겸, 웬만한 거리는 죄다 걸었는데 미술관과 전시장들이 워낙 넓은데다 고궁들까지 쏘다니다보니 발에 쥐가 날 정도였다.
9월의 서울 하늘은 맑고 높고 아름다웠다. 낮에는 아직도 90도 대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였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너무 좋을 때 왔다”고들 했다. 바로 8월말까지 더위가 난리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장 좋았던 것은 서도호와 유영국 전시였다.
설치미술가 서도호(64)는 LA 미술계와도 인연이 깊고, 개인적으로도 인터뷰한 적이 있어서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다. 그는 무명시절이던 1998년, 카파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돼 LA한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때 선보인 ‘서울 집/LA 집’(MOCA 소장)이 새로운 도시로 옮겨갈 때마다 확장되어 볼티모어 집, 런던 집, 시애틀 집을 더했고,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서울 집/서울 집/가나자와 집/베이징 집/포항 집/광주 집/필라델피아 집’이 걸려있다.
라크마(LACMA)는 서도호의 ‘문’(Gate)과 ‘뉴욕 22번가 집’(348 West 22nd Street)을 소장하고 있고, 오래전 그에게 위촉한 ‘경복궁 자경전’이 지난 5월 개관한 게픈 갤러리에 들어섰다. 날아갈 듯 유령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운 설치작품이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서도호의 초기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화해온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주와 거주, 집이라는 공간,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에 관한 주제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온 그의 작업세계를 세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내년 2월9일까지, 매일 예약매진에 긴 줄이 늘어서지만, 한국 가는 분들은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유영국: 산은 내안에 있다’ 전시 역시 머리칼이 쭈뼛 서도록 놀랍고 아름다웠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모던보이’ 유영국(1916-2002)은 김환기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다. 한국의 자연을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큰 화면에 펼쳐내며 절대추상의 경지에 오른 작가,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보라 등 원색의 긴장감이 뿜어내는 작품들 앞에서 치열하고도 절제된 예술혼을 마주하는 경험은 특별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과 세화미술관의 게오르그 바셀리츠(Georg Baselitz, 1938~2026) 역시 대단한 전시였다. 미국 개념미술의 선구자 솔 르윗의 전시는 처음으로 개념미술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세계대전이라는 개인적 역사적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킨 독일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거꾸로 선 형상과 파편화된 신체를 통해 삶과 예술을 치열하게 탐구한 거장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서울에 미술관이 얼마나 많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전시마다 관람자들이 거의 모두 젊은이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하필 9월에 이처럼 중요한 전시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5년 사이 서울미술계의 시간표가 ‘프리즈(Frieze Seoul) 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제미술시장의 최강 아트페어인 프리즈가 2022년 9월 키아프에 맞춰 서울 코엑스에 둥지를 튼 이후, 세계적인 갤러리들과 서울의 미술관·갤러리들도 자연스럽게 이 시기에 중요한 전시를 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울의 9월 초는 작가, 컬렉터, 갤러리 관계자들이 집결하는 ‘서울미술계의 개막시즌’ 또는 페스티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마치 2019년 2월에 ‘프리즈 LA’가 시작되자 매년 그 주말 전후로 LA아트쇼와 펠릭스 아트페어를 비롯해 수많은 페어와 미술행사, 독립아트 프로젝트들이 열리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달라진 서울 미술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9월초 ‘프리즈 서울’ 전후의 2주가 사실상 ‘서울아트 시즌’임을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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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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