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음마다 연보랏빛 꽃이 자욱한 운무를 비집고 고개를 내민다. 한 송이, 두 송이 세면서 시골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천 송이, 만 송이, 셀 수 없는 꽃동산에 파묻힌다. 야산의 능선을 따라 굽이치는 꽃의 파도, 그 사이에서 평온한 부처의 미소와 고고한 소나무. 참으로 몽환적이고 이질적인 세계다.
경북 문경시 월방산(360.1m) 중턱의 작은 사찰 봉천사는 매년 가을이면 보라색 개미취에 뒤덮인다. 매년 장관을 이루지만 올해 유독 꽃이 풍성하게 피었다고. 올해 사진을 보고 한 누리꾼이 ‘저승같아요 ♥ 아름다워요’라며 ‘극찬한’ 댓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라색은 환상, 이(異)세계, 신비로움을 상징하는 색. 삶과 죽음 사이 연옥이 보랏빛이라 하니 어찌 보면 통찰 있는 반응일지도 모른다.
개미취 7송이가 2만3000㎡ 꽃밭으로
지금은 축구장 3개 넓이도 넘는 2만3,100㎡ 면적에 꽃이 빼곡하지만 봉천사 꽃밭은 본래 개미취 일곱 송이로 시작했다. 주지 지정 스님이 12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 주위는 온통 황량한 야산이었다. 칡넝쿨 천지에 사이사이 주민들이 일군 작은 텃밭이 있을 정도였다.
바위 반 잡초 반 야산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야생화로 경관을 꾸며 볼 요량으로 스님이 선택한 것이 개미취였다. 한 해 두 해 심고 가꾸다 보니 3년째에는 1,000㎡까지 꽃밭이 커졌다고 한다. 다시 1년이 지나 3,300㎡ 정도로 3배 넘게 넓어지자 어떻게들 알고 사진사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고.
이제는 제법 입소문을 탄 개미취 축제는 2021년 처음 열렸다. 지정 스님은 “먼 타향에서까지 사진사들이 알고 오는데 정작 지역 사람들은 (봉천사 꽃밭을) 몰라 아예 축제를 열게 됐다”고 개최 취지를 설명했다. 첫 축제 때부터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 관리에 애로가 많았다. 스님은 “화장실도 부족하고 너무 많은 차량이 몰려 마을 출입로가 완전히 봉쇄됐다”며 “역량 부족을 깨닫고 축제와 꽃밭을 없앨까도 고민했다”고 말했다.
주위의 만류로 12년째 꽃밭지기를 하고 있는 스님을 이제는 온마을이 함께 돕는다. 3월부터 마을 주민들은 품을 팔아 봉천사 꽃밭 가꾸기에 바쁘다. “꽃밭을 일군 지 5년 정도 지나니 꽃도 많아지고 땅의 지력도 다해 객토(지력이 풍부한 흙을 보충하는 일)에 병충해 예방에 할 일이 많아졌다”고 스님은 말한다. 물이 귀한 바위산이라 직접 샘도 파고 물도 댄다고. 현재 꽃밭을 관리하는 데에만 연 1,400번의 품이 드는 터라, 축제 입장료는 대부분 품값으로 쓰인다. 일곱 송이 야생화가 마을을 먹여 살리는 명소로 자란 셈이다.
자연과 조화가 일군 몽환적인 꽃밭정성이 빛을 본 것인지 올해 봉천사 개미취는 유난히 풍성하고 빛깔이 좋다. 4년 전부터 개미취 사이사이에 흰색, 보라색 코스모스도 심었는데 이 또한 올해 잘 자랐다. 혹여나 개미취가 못 자란 해에는 코스모스가, 코스모스가 못 자란 해에는 개미취가 보완해주기를 바라며 섞어심기를 시작했는데 둘 다 풍작이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이런 조화가 봉천사 꽃밭의 차별점이다. 이보다 넓은 꽃밭이 많고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꽃밭도 없지 않지만, 봉천사처럼 꽃, 암석, 사찰, 불상,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장면은 찾기 힘들다. ‘예쁜 꽃밭’과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꽃밭’을 가르는 지점이랄까.
꽃밭 사이사이 숨겨진 바위 역시 봉천사의 자랑이다. 본래 넝쿨과 잡초에 뒤덮여 보이지 않던 것들을, 스님이 개미취밭을 가꾸며 하나둘 세상에 드러냈다. 올라서면 봉천사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등대바위’, 바위에 앉으면 절로 등이 펴져 참선 자세가 잡힌다는 좌선대, 꽃밭 전체를 가장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봉천마루 등 스님이 직접 스토리텔링까지 해서 ‘봉천사 개미취 13미학’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하나 스님이 직접 고른 명소라고.
봉천사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도 일품이다. 학가산(882m)까지 시야에 시원하게 뚫려 눈이 평안하다. 낙동강, 내성천, 금천 세 줄기 강이 만나는 삼강 지역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인 만큼 예전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삼국시대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전투가 잦았다. ‘삼국유사’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신라까지 노리던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를 김유신이 이 일대에서 물리쳤다는 전승이 실려 있다.
봉천사 개미취 축제는 이달 18일까지 계속된다. 축제 입장료에는 매실차와 도토리묵 값이 포함돼 있는데, 이 도토리묵이 별미다. 옛 방식대로 직접 쑨 묵이라 ‘젤리’ 같은 공장 묵과 비교하면 실례다. 혀에 착 감기는 식감에 쌉쌀한 도토리향이 진하다. 시골 할머니가 쑤던 묵 맛을 기억하는 이라면 진가를 알아볼 만하다. 별도로 판매하지는 않으니 이 묵을 맛보기 위해 봉천사를 찾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다.
첩첩산중의 오아시스, 돌리네습지봉천사 인근 굴봉산(399.8m)에도 기이한 경관이 있다. 해발 270~290m 능선에 자리한 문경 돌리네습지다. 통상 저지대에 발현하는 습지가 해발 300m에 가까운 고지대에, 그것도 첩첩산중에 있다니 실로 경이롭다.
이 습지는 일대 석회암 지대가 빗물에 녹아 가라앉으며 생긴 접시 모양의 분지, 이른바 돌리네에 물이 고여 형성됐다. 강원 정선 민둥산 등에서도 돌리네를 볼 수 있지만 대부분 건기에 물이 마른다. 문경 돌리네는 산 중턱에 있으면서도 연중 물이 마르지 않고 49만4,434㎡ 규모의 습지 생태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통상 석회암 지대는 바닥에 갈라진 틈이 많아 물이 고이지 않고 지하로 빠진다. 그런데 굴봉산에서는 석회암이 풍화되는 과정에서 녹지 않고 남은 미세 점토가 수만 년에 걸쳐 바닥에 쌓였다. 붉은빛을 띠는 이 점토층을 ‘테라로사’라 하는데, 이것이 바닥 틈을 촘촘히 메우며 천연 방수층을 형성했다. 덕분에 연못도 아닌 습지가 조성된 것.
문경 돌리네습지는 초지와 산림 환경에 싸여 있어 생물다양성이 높다. 동식물 932종이 서식하는데,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수달을 비롯해 담비, 삵, 붉은배새매 등 멸종위기종 8종이 작은 생태계 안에서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다. 2017년 국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2024년 2월 국내 25번째이자 경북 최초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전 세계 람사르 습지 2,500여 곳 가운데 돌리네 지형에 생긴 습지는 이곳을 포함해 6곳뿐이다.
사람 또한 습지의 수혜자다. 물이 귀한 경북 내륙 산간 지역에서 이곳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주민들은 분지를 다랑논으로 일궈 벼농사를 지었는데, 석회암 돌리네 지형에서 벼를 재배한 국내 유일 사례다. 현재도 습지에 논을 일부 보존하고 있다.
유의할 점은 차량으로 이곳을 방문할 때 내비게이션 앱에서 ‘문경 돌리네습지’가 아닌 ‘문경 돌리네습지 주차장’을 검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돌리네습지로 바로 이어지는 길은 관리차량용 비포장도로다. 일반인은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전동카트에 탑승해 습지까지 이동해야 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