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이라고는 없는 낡은 유원지의 포장마차 거리. 가게에는 주인도 직원도 없지만 음식은 하나같이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먹음직스러운 모습과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행인은 참지 못하고 주인 없는 가게에 앉는다. 어느새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두 사람. 음식을 탐하던 둘의 얼굴에 난데없이 파리채가 날아든다. 해가 지고 등불이 켜지자 거리 분위기가 급변한다. 형체 없는 유령이 배회하고 곳곳에서 기이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생기 없던 거리는 신들의 환락가로 변한다.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 그 거리를 직접 걷고 왔다. 11일 제주 제주시 제주동화마을 부지에 새로 들어선 ‘스튜디오 지브리전(展) 인 제주(in Jeju)’의 대표 공간 중 하나다. 평온하다 못해 다소 칙칙한 거리가 붉게 물들고 영화에서 들리던 파리채 소리와 신들을 맞이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치히로의 부모처럼 ‘홀린 듯’ 신들의 거리에 들어선 기분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등 대표작은 물론 ‘붉은 돼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의 배경과 캐릭터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국내 최대 지브리 전시공간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은 일본 현지에서 큰 호평을 받은 ‘지브리의 입체조형물전’에 전시된 것이다.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도쿄에서 열렸다. 제주 지브리전도 이름 탓에 단기 전시로 오해하기 쉽지만 근래 몇 년간은 철수 계획이 없는 준상설 공간이다. 전시물의 대부분은 도쿄 전시를 위해 처음 제작됐지만, 오히려 제주에서 훨씬 오래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전체 공간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12개 작품을 주제로 3,100㎡(약 940평) 면적에 조성됐다. 그중에서도 넓은 면적을 할애받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관은 기존 전시의 조형을 재사용하지 않고 새로 만들었다. 치히로가 돼지로 변한 부모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유야(油屋)로 가는 골목은 영화에서 한순간에 변하는 분위기를 조명과 음향으로 그대로 구현했다. 숲의 정령 코다마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모노노케 히메’의 숲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전시를 위해 특별히 고화질로 제작됐다. ‘JEJU(제주)’로 행선지가 바뀐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 정말 걸어다니는 듯한 움직임을 구현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주목할 포인트다.
높이가 5m에 달하는 거대한 라퓨타 성도 오직 제주관을 위해 새로 조형해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것이다. 타 지브리 전시에서 라퓨타가 전시된 적은 많지만, 이 크기로 구현된 적은 없다. 앞에 서면 위축될 만큼 압도적인 규모다. 멀리서 성의 전체적인 형태를 감상하다가 고개를 숙이면 성 하단부까지 뻗어나온 나무 뿌리도 보인다. 상하좌우전후 모든 방향의 조형이 축약없이 세세히 구현돼 있다. 라퓨타뿐만 아니라 모든 전시품이 어느 각도에서 감상해도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도록 철저히 고증됐다..
전시는 ‘이웃집 토토로’의 막내 주인공 메이를 쫓아 미지의 숲속으로 들어가며 시작된다. 관람객이 직접 숲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연출해 몰입감을 높였다. 길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거대한 굴 속의 토토로, 그리고 토토로 배 위에서 뒹굴고 있는 메이다. 이번 전시 포스터의 대표 이미지로 쓰이기도 한 공간이다. 포근포근해 보이는 토토로의 복슬한 질감을 잘 살려 보는 이의 마음이 푸근해진다.
제주 지브리전은 단계적으로 몰입감을 끌어올리는 연출에 집중했다. 메이를 따라가다 길 끝에서 먼저 도착한 메이와 토토로가 어울리는 모습을 마주하듯, 천공의 성 라퓨타 앞에 서기 전에는 천둥 번개가 치는 길을 지난다. 치히로가 일하던 온천장 앞에 서기 전에는 온천장 앞 거리가 ‘신들의 공간’으로 변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지금의 지브리를 일군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가 직접 개막식에 참석해 본사 차원의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즈키 프로듀서는 이날 개막 행사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늘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그라운드, 즉 배경’이라고 말했다”며 “배경이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캐릭터가 살아나지 않는데, 제주 전시를 둘러보니 배경이 참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스즈키 프로듀서는 ‘모노노케 히메’의 숲을 가장 훌륭한 공간으로 꼽았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굳이 제주도를 전시 장소로 선정한 이유는 주위 환경의 몰입감 때문이라고 한다. 2023년 개장한 제주동화마을은 우거진 조경수 사이로 제주의 토속신 석상과 동자석이 산재한 제주의 자연을 활용한 개방형 공원이다. 제주신 석상 사이로 자그마한 코다마들이 거니는 모습을 보면 전시관에 입장하기 전부터 히메의 숲에 발을 디딜 듯하다.
지브리전 개관 전부터 ‘마녀배달부 키키’를 주제로 한 코리코 카페와 지브리 공식 굿즈 매장 도토리숲이 부지 내에서 운영된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전시를 염두에 둔 협업이 꾸준히 이어져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름꽃 수국과 수련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기도 하다. 요즈음 한창 만개해 경관이 절정에 달했기에 방문 적기다.
웨딩촬영 성지 ‘비밀의 숲’도 근처에제주동화마을에서 불과 4㎞ 거리에 또 다른 신비한 숲이 있다. 이름도 ‘비밀의 숲’이다. 선인장처럼 Y자 모습으로 자란 편백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져 사진 촬영 명소로 이름난 곳이다. 숲 사이사이 숨어있는 돌탑, 수국정원, 동백나무가 볼거리를 더한다.
비밀의 숲에서 의외로 유명한 장소는 드넓은 들판. 빽빽한 숲 위아래로 푸른 하늘과 들판이 펼쳐져 웨딩 사진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날에도 셀프 웨딩촬영을 하는 예비 신혼부부가 10쌍이나 있었을 정도다.
진입로가 비포장도로라 도보 이동이 불편하지만 경치는 숲 내부 못지않다. 해발 380m의 거슨새미오름과 송당리 들판이 숲의 절경과 이어져 있어 느긋하게 걸으며 숲을 찾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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