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도서관’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거대한 돔 천장에 그려진 천사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이 서고의 지식에 통달하면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천사들 발 아래 뚫린 8개의 창문에 햇빛이 스민다. 빛이 모이는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위풍당당한 대리석 인물상. 20만여 권의 고서(古書)가 그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다. 사다리를 타야 겨우 위 칸을 이용할 수 있는 높은 책장이 한 층도 아닌 두 층씩 쌓여있다. 미지와 신비를 연구하는 공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지만 실은 이름도 평범한 현실의 도서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곳,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이다. 외형도 빼어나지만 백미는 역시 내부다. 이처럼 빈(비엔나)에는 안에 들어가야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모르면 지나치기 십상인 빈의‘숨은 방’을 찾아봤다.
황제 옆에 서면 진리에 통달한 기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여러 건물에 나눠져 있다. 그중 ‘프룽크잘(Prunksaal)’이라 불리는 관은 합스부르크 황가의 정궁 호프부르크의 일부이자 옛 황실도서관이다. 호프부르크는 다른 나라 정궁과 달리 비대칭적이고 비정형적이다. 수백 년에 걸쳐 새 건물을 하나씩 건축하는 방식으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규모와 유명세로 ‘빈의 베르사유’라 불리는 별궁 쇤브룬궁에 밀려 많은 관광객이 호프부르크는 외부만 보고 간다. 현재도 일부 구역이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정궁치고는 그리 붐비지 않는 이유다.
프룽크잘은 호프부르크의 보석 같은 방이다. 쇤브룬궁을 설계한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의 유작으로 1726년 지어졌고 지금은 국립도서관의 상징적 공간으로 쓰인다. 앞서 언급한 도서관 정중앙 조각상의 주인공은 프룽크잘 건립 당시 통치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 그 주위로는 합스부르크가 역대 통치자 16인의 조각상이 둘러서 있다. 천장 프레스코화는 카를 6세가 지식과 과학의 수호자로서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그려졌다.
황제의 조각상 옆에 서면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세계의 진리에 통달한 기분이다.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가죽에 금박 제목이 새겨진 고서가 도처에 있어 자못 신비한 분위기다. 고서 대부분은 신성로마제국 명장 사부아의 오이겐 공자가 평생 모았던 것. 이전에도 황실도서관이 있었지만 공자의 장서를 보관하기 위한 새 황실도서관으로 프룽크잘이 세워졌다.
호프부르크의 얼굴 격인 ‘노이에부르크(신궁·新宮)’도 감탄스러운 내경을 자랑하는 숨은 방이다. 19세기 황제의 칙령으로 제국박물관 격인 빈 미술사박물관, 빈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기획됐지만 예산 부족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현재 모습은 계획의 반만 완성된 형태로, 원래는 같은 모양의 반원형 건물이 건너편에 대칭으로 들어서야 했다. 궁과 인접한 옛 도성 성문이 궁을 바라보지 않고 궁과 수직으로 놓인 낯선 풍경도 본 계획을 고려하면 이해가 간다. 궁이 완성됐다면 성문이 두 궁 건물을 경계로 만들어진 원형 광장 정중앙을 향했을 것이다.
노이에부르크 실내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대리석이다. 형제뻘 건물인 미술사·자연사 박물관만 해도 차분한 톤에 화려한 금박이 수놓였듯이, 빈의 다른 궁 건축은 휘황찬란한 장식미를 자랑하지만 노이에부르크는 위엄 있고 견고하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역사박물관, 에페소스 박물관, 국립도서관 열람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호프부르크의 가장 상징적 공간이지만 실내 방문객은 가장 적은 곳 중 하나다. 덕분에 인파에 부대끼지 않고 웅장한 황궁을 음미할 수 있다.
어느 하나 비슷한 데 없는 도심 교회·성당
입장료 없이 둘러볼 수 있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공간도 많다.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은 견학 프로그램을 통해 출입할 수 있는데 온라인으로 1인·당일 무료 신청도 가능하다. 독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4개 국어로 설명이 제공되고, 설명을 줄여 사진 촬영 시간을 더 많이 편성한 사진 투어도 있다. 영어 투어와 사진 투어가 가장 수요가 많아 빨리 매진된다.
주목할 공간은 국가회의장. 오스트리아 의회 상·하원이 통합 회의를 하는 국가회의 장소로 쓰이는데, 국가회의는 대통령 취임·기소·탄핵, 전쟁 선포, 국민투표 의결에만 열리는 터라 일상적으로 사용되진 않는다. 이 회의장이 중요한 이유는 19세기 당시 의회의사당 원형을 보존한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상·하원 회의장과 중앙 열주회랑(우리 국회의 로텐더홀 격)은 전후 복구 및 개보수를 거치며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시내 곳곳에 산재한 성당·교회도 다채롭다. 14세기 건립된 빈의 대표 성당 성슈테판대성당 외에도 17~18세기 종교 건축이 즐비한데 어느 하나 비슷한 모습이 없다. 슈테판성당이 전형적인 고딕성당으로 높고 어둡고 장엄하다면, 다른 건물은 대부분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고 밝다. ‘착시 돔’ 천장화와 금빛 실내가 특징인 예수회 교회, 그 길 건너편 흰색 중심의 도미니코 교회, 실내 모습은 슈테판성당보다 좋다는 베드로성당, 천계전쟁을 표현한 부조가 인상적인 미하엘교회 모두가 도심부에 밀집해 있어 가볍게 순회하기 좋다.
성삼위일체동방정교회는 가톨릭계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비잔틴 부흥 양식으로 지어져 태생부터 서로마 후예인 빈의 나머지 경관과 이질적이다. 밝은 사암·석회석 중심의 빈 건물 사이에 짙은 벽돌 건물이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내부도 어두운 석재에 금빛을 얹어 가톨릭 성당에 비해 분위기가 무겁다.
오토 바그너와 ‘빈 분리파’가 이끈 근대 건축
500년 세월 동안 제국 수도였던 만큼 빈의 도시 경관을 논할 때 제국 건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제국은 영원하지 않은 법.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빈은 ‘제국이 사라진 도시에 무엇을 지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맞닥뜨렸다.
의사당 하원 회의장 중앙을 낫과 망치를 든 수리가 장식하고 있을 만큼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진보세가 강했다. 수도인 빈은 특히 진보세가 강했는데 1918년부터 1934년 사이 사회민주인민당(현 사회민주당)이 절대적 지지를 얻은 시기를 ‘붉은 빈’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맞게 대중을 위한 시설이 대폭 확충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공임대주택. 현재도 빈 시민의 60% 이상이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붉은 빈 시기 공공임대주택의 대표적 건물은 19지구의 ‘칼 마르크스 호프(Hof·집)’다. 1930년에 준공돼 올해로 97주년을 맞는 고택이지만 5,000여 가구가 입주할 수 있어 현대의 어지간한 아파트 대단지를 상회하는 규모다. 실제로 보면 위용이 어마어마한데 이는 칼 마르크스 호프가 ‘대중을 위한 궁전’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제국 주권자인 합스부르크가가 호프부르크를 남긴 것처럼 공화국 주권자인 대중도 궁을 짓자는 취지였다.
피셔 폰 에를라흐가 빈의 제국 건축을 대표한다면 빈의 근대 건축 대표 주자는 오토 바그너다. 바그너는 제국이 해체되기 7개월 전에 눈을 감았지만 기존 제국 건축과 차별화된 빈의 건축 노선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바그너 생전 빈을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는 고전·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 등을 계승한 역사주의 건축 사조가 성행하고 있었다. 바그너 본인도 커리어 초기에 역사주의에 입각해 건축물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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