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의 그림인 듯, 어린아이의 놀이 블록인 듯, 알록달록한 사각형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모자이크 타일을 붙이다 싫증 난 장인이 심술을 부려 타일에 구멍을 송송 뚫어놓은 듯도 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도록 세워진 벽은 사실 절의 입면이다. 승려들은 벽을 바라보고 면벽 수행을 한다던데, 이 벽을 바라보면 번뇌가 가실지, 오만 영감과 생각이 홍수처럼 마음을 휩쓸지 궁금해진다.
경포호에 소박한 사찰이 세계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름 있는 대사를 배출한 적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보·보물 한 점도 없는 이 절이 말이다. 강원 강릉시 인월사는 올해 3월 세계건축공동체(WAC)에서 주관하는 세계건축상(WA Awards)을 수상한 이래 ‘힙한 불교’의 사례로 알려지며 금세 입소문을 탔다. 이른바 ‘또 나 빼고 재미있는 거 하는 불교’ 밈을 확산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절 같지 않은 절’ 인월사를 필두로 ‘조감도대로 지어진 공공건물’ 강릉시립미술관 솔올관까지, 강릉에는 자랑할 만한 세련된 공간이 숨어 있다.
강릉 필수 코스가 된 ‘절 같지 않은 절’
인월사는 부처의 눈썹을 형상화한 초승달 모양 건물이다. 좁고 긴 대지를 나눠 법당과 명상센터를 따로 짓는 대신 하나의 건물에 통합하고 중앙에 로비를 뒀다. 지붕도 높이가 불규칙한 곡선 형태를 띠고 있는데, 사찰을 둘러싼 주위 지형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도록 설계한 것이다.
인월사의 상징과도 같은 알록달록한 벽은 ‘인드라월’이라 부른다. 색 블록을 그물처럼 길게 이어 붙였다. 모든 존재가 서로를 비추며 연결돼 있다는 화엄사상의 ‘인드라망’을 형상화한 것. 사찰에 따르면 불교의 오방색을 활용한 현대식 단청이라고 한다. 블록에 뚫린 구멍은 빛과 바람의 통로다. 자기 색을 조금 덜어내 더 자연스럽게 소통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벽 앞 연못은 ‘카르마의 거울’, 즉 업경(業鏡)이다. 경내에 들어서기 전 물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찰하라는 의미다.
인월사를 처음 마주하는 이는 생각보다 규모가 아담하다 여길 수 있다. 전국 유수의 고찰이 장대한 역사와 웅장한 법당을 과시하니 무리도 아니다. 법당 건물도 이 한 채가 전부인 만큼 천천히 세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절이다. 인드라월을 따라 걸으면 시야에 따라 변하면서도 또 비슷한 무늬가 눈에 담긴다. 멀리서 볼 때는 선명한 모니터 화면에 띄운 그림마냥 선명하고 균질해 보이는 벽이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 군데군데 파인 자국을 드러낸다.
다소 휘황찬란한 외견에 내부도 그렇지 않을까 선입견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않다. 평범한 부처상 앞에서 차분히 염불을 외는 스님이 있는, 평온한 절의 내부 모습이다. 본당 로비 건너편에는 공양실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조·판매하는 커피식혜, 작약식혜가 별미다.
산불이 나기 전 인월사는 동네 신도들만 찾는 작은 절이었다. 평범한 주택가 뒷산에 있던 이 절은 2023년 4월 일대를 덮친 강릉산불에 전소돼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전통적인 사찰 건축 대신 현대적인 모습을 택한 이유는 의외로 현실적이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전통 목조 건축이 훨씬 비용이 많이 들고 공간 활용 제약이 커 콘크리트 건축을 택했다고. 별다른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찰도 아니라 복원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신 원형 보존 의무도 없었다. 지주 재범스님이 윤경식 건축가가 설계한 상무대 군 명상센터를 보고 ‘이거다!’ 하고 직접 건축을 의뢰했다고 한다.
언덕에 지어진 고고한 순백의 미술관강릉시립미술관 솔올관은 ‘조감도대로 지어졌다’고 할 만큼 설계 원안이 온전히 건물로 구현된 드문 사례다. ‘백색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립한 마이어 파트너스의 설계작으로, 사무소에서 30여 년을 근무한 한국계 미국인 연덕호 수석 디자이너가 진두지휘했다. 교동 7공원에 있는 이 미술관은 기부 채납으로 지어졌는데, 강릉시가 기부 주체인 공원 시행사에 내건 조건 중 하나가 해외 건축사무소 설계였다고 한다. 마이어 파트너스의 건축 철학을 알고 설계를 의뢰한 만큼 시공 과정에서도 전권을 위임했다고.
해발 62m 언덕 위에 자리한 탓에 도심 진입로에서는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보행로를 따라 경사를 오르면 백색 미술관이 서서히 드러난다. 진입로를 걸으며 ‘건물이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게 하는 것이 건축가의 의도라고. 건물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면 순백을 향한 집념도 함께 느껴진다. 마치 ‘형태가 완벽하면 색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라고 단언하는 듯한 공간이다. 높은 언덕 위 순백의 건물이라 고고한 신전 같기도 하다. 솔올관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주출입구 반대로 길게 뻗은 경사로가 인상적이지만 2층 출입문이 폐쇄돼 있다.
미술관은 중정을 중심으로 세 개의 파빌리온이 둘러싼 구조다. 중정을 얕은 인공연못이 둘러싸고 있다. 한옥 안마당과 닮았다. 주출입구 반대 방향으로 길게 뻗은 경사로가 내부와 외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핵심 요소지만 전시 동선상 평상시에는 2층 출입문을 폐쇄해 놓는 점이 아쉽다.
미술관 내부도 외부처럼 순백의 향연이다. 미술대학에서 졸업작품 전시를 준비할 때 반드시 선행되는 작업이 작품을 전시할 순백 전시대를 제작하는 일이다. 지난 전시로 지저분해진 전시대를 닦고 흰 페인트를 다시 칠해 작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한다. 솔올관은 미술관 전체가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흰 전시대와 같은 인상을 준다.
통상 자외선과 직사광선에 의한 작품 변형을 차단하기 위해 미술관은 햇빛이 차폐되도록 짓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자연의 빛을 최대한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철학으로 설계됐다. 이 철학이 돋보이는 지점은 1층 전시구역에서 바깥으로 돌출된 작은 공간. 모서리가 둥근 삼각형 모양 천장 틈으로 자연광이 쏟아져 내린다. 그러나 주 전시실과 부분적으로 분리된 돌출 공간이라 다른 작품에 빛이 닿지 않는다. 설계철학을 지키되, 공간의 주목적을 망각하지 않는 세심한 설계다. 현재는 ‘놀이’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솔올관에서는 ‘설악의 화가’ 김종학 특별전이 10월 25일까지 열린다. 한국 현대화 거장으로 설악의 자연을 표현한 작품세계로 특히 유명하다. 작가의 작업도구와 작업복, 물감까지 옮겨와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도 마련됐다.
강원도 성당의 모체, 임당동성당강릉 시내로 돌아오면 임당동성당이 있다. 1955년,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신축된 성당으로 그 시기 강원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간직하고 있다. 뾰족한 종탑과 지붕, 첨두형 아치 창호, 외벽 하중을 분산하는 부축벽 등이 특징이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꽤나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이 때문인지 영동 지역의 많은 기독교 건축이 임당동성당을 본떠 세워졌다. 일종의 ‘원본’ 성당인 셈. 2010년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57호로 지정됐다.
스테인드글라스는 1992년 제작됐는데 가톨릭 신부이자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인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미술 유학을 한 조 신부는 귀국 후 부산 남천동 주교좌성당, 안양 평촌성당 등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는데 임당동성당이 그의 국내 첫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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