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은 지루한 단어라고? 듣기만 해도 경직된 관료 문화, 고루한 사무실처럼 재미와는 거리가 먼 것들만 떠오른다고? 그런 사람에게는 ‘행정도시’도 지루할 수밖에 없는 게 자연스러운 결론이겠다. 모름지기 여행지라면 ‘사랑의 도시’나 ‘패션의 도시’, 하다못해 해안도시나 전통도시는 돼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면, 태생부터 행정도시로 기획된 세종시는 여행과는 상극으로 여겨질 터.
그러나 세종시는 마음 편히 도시 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조치원읍 시절부터 이어지고 있는 소박한 전통과 계획도시 특유의 반듯한 녹지가 조화롭다. 유일한 도심형 국립수목원인 국립세종수목원과 인근 호수공원에서 눈이 트이고, 세종전통시장의 풍성한 먹거리에 혀가 트인다.
세종의 랜드마크 국립세종수목원
국립세종수목원은 경기 포천시 포천국립수목원, 경북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국립수목원이다. 최초의 도심형 국립수목원이기도 하다. 포천 광릉숲 한가운데, 봉화 백두대간 산골짜기처럼 깊은 자연 속에 들어선 다른 두 곳과 달리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 세종시가 설계 단계부터 도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앙녹지축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수목원이 이 녹지축의 핵심으로, 도시 열섬을 완화하고 시민에게 자연을 선물한다. 수목원의 자연 너머로 솟아 있는 도심 스카이라인이 인상적이다.
세종수목원의 상징은 사계절 온실이다. 붓꽃을 형상화한 유리 온실 세 동이 꽃잎처럼 이어져 있다. 각 동이 지중해온실, 열대온실, 특별전시온실로 나뉘어 기후대별 식물을 사계절 내내 만날 수 있다. 거대한 온실에 위압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유려한 곡선 덕에 포근하다. ‘꽃잎’ 사이로 난 출입구로 꽃의 ‘씨방’으로 들어가면 온실의 중앙 원형 로비에 도착한다. 3면으로 3개의 온실 출입구가 나 있다.
지중해온실에서는 연말까지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작품세계를 자연과 조화시킨 특별전 ‘앙리 마티스가 그린 오색 정원’이 열린다. 수국, 박쥐란, 한련화, 제라늄 등 온실 식물 사이에 마티스 오마주 작품 약 50점을 조화했다. 식물 사이에 예술을 심어놓은 셈이다. 이 온실의 하이라이트는 ‘마티스가 사랑한 다섯 가지 색채’. 초록 식물 사이로 푸른 건축물, 붉은 수로, 노란 화분, 분홍 꽃이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공간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신설한 전시물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듯 온실과 잘 어울린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식물답게 이달 19일부터 ‘두 번째 계절’로 전시를 새단장했다. 여름이 지난 만큼 가을 식물 위주로 공간을 재편하고 전시물도 추가했다고.
특별전시온실에서는 ‘가든마블: 세계의 정원’이 다음 달 11일까지 진행된다. 세계 각국의 정원이 마치 보드게임처럼 길을 따라 조성돼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 정원, 이브 생로랑의 ‘뮤즈’ 정원으로 유명해진 모로코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 등을 재현했다. 바닥 칸에 적힌 ‘꼭 가봐야 할 수목원’을 보며 다음 여행을 준비할 수도 있다. 세종수목원은 이전부터 이런 예술·정원 융복합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왔다. 세종수목원의 차별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온실 밖으로 나오면 한국전통정원이 있다. 온실의 이국적인 식물과 대비되는 고즈넉한 분위기다. 가장 아름다운 궁궐인 창덕궁의 주합루, 부용정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궁궐정원이 전통정원의 백미다. 담양 소쇄원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별서정원, 소박한 민가정원, 인접한 분재원도 함께 즐기기 좋다.
파닭의 고향 세종에서 즐기는 시장 먹거리수목원 옆에는 세종호수공원이 있다. 호수 면적 32만여㎡로 일산호수공원을 넘어선 국내 최대 인공호수공원이다. 호수를 중심으로 산책로 8.8㎞와 자전거도로가 이어지고, 수상무대가 있는 무대섬, 여름이면 물놀이가 가능한 물놀이섬 등 5개의 인공 섬이 조성돼 있다. 돼지갈비를 먹고 호수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세종 시민들의 주말 일과라고.
호수공원 북쪽에는 대통령기록관이 있다. 역대 대통령이 남긴 문서, 사진, 영상 등을 모아 전시하는 곳이다. 실제와 유사하게 재현한 대통령 접견실에 직접 앉아볼 수 있고, 정상외교 과정에서 각국 정상이 주고받은 공예품과 기념품도 진열돼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책 보고서부터 금융실명제 공포문까지, 뉴스를 장식했던 현대사를 실물 문서로 확인할 수 있다. 호수공원 산책 겸 들르기에 좋다.
조치원읍 시절부터 이어져온 세종전통시장도 빠뜨릴 수 없다. 이제는 전국 어디서든 기본 메뉴가 된 파닭의 발상지다. 원래 조치원에서는 통닭 하면 곧 파닭이라고 알아들을 정도로 파닭이 닭튀김의 기본 형태였다. 타지의 파닭집에서는 튀긴 닭에 생파를 얹고 겨자소스를 뿌려 먹는 경우가 많지만 원조는 다르다. 갓 튀긴 닭에 파채를 얹고 박스 뚜껑을 덮는다. 잔열에 파의 숨이 죽으며 파 향이 닭에 스며드는 것이 핵심이다. 별도의 소스가 필요 없다. 파닭을 비롯한 시장 먹거리를 사와 ‘포트럭’(각자 음식을 사와 함께 나눠 먹음) 방식으로 먹는 것도 세종 여행을 즐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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