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의 나이에 발표한 책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으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글로벌 스타가 됐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내놓은 책이 세계적인 화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제목에 담긴 도발적인 문구도 영향을 미쳤다. 끝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이 적고 잘못 이해한 사람도 많지만 모두들 이 책을 언급하고 논평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후쿠야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진정 역사가 끝난 것으로 믿는가. 긴 제목 속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둔 곳은 앞부분 ‘역사의 종말’이었지만 그가 집중하고 있는 곳은 책의 제목에서 무시되곤 하는 뒷부분이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말을 장식하고 있는 시대에 ‘최후의 인간’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역사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강조하는 선언적 문구다. 반면 ‘최후의 인간’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나태한 인간을 지적하는 비판적 화두다.
그는 자유주의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이념 투쟁의 역사는 끝났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역사의 최후 단계에 선 인간이 더 높은 가치를 향한 패기 가득한 인정 욕구, 즉 ‘티모스(thymos)’를 잃어버린 채 안전과 물질적 풍요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문명사적 위기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철학자 플라톤과 니체가 던졌던 ‘티모스’의 화두를 인용해 풍요로움의 권태 속에서 안일해진 최후의 인간이 파괴적인 전제주의 충동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책 속에서 최후의 인간을 설명하며 도널드 트럼프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언급한 대목이다. 책이 발표된 1992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와 부동산 개발 업자였던 트럼프는 권력과 명성을 손에 쥐고 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그들을 이상적인 티모스적 인간으로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지난달 회고록 ‘마지막 인간의 영역에서’를 출간한 후쿠야마는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트럼프처럼 부유한 부동산 개발 업자가 정치적 권력욕에 휩싸여 민주주의 자체를 흔들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최후의 인간’들은 불안한 나머지 모든 것이 썩어빠졌다고 선동하는 포퓰리스트들에게 넘어가게 됐다”면서 “이런 모습을 30여 년 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는데 제대로 지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후쿠야마는 최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인공지능(AI)의 도전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이 AI를 새로운 종의 출현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AI를 과학기술의 진보로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얼마나 해로울지는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엔 권력욕에 가득 찬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출현을 30여 년 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녹아 있다.
AI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는 후쿠야마뿐이 아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AI의 ‘대부’ 제프리 힌턴 교수를 포함한 세계적 AI 석학 22명은 최근 공동 논문을 통해 인류가 AI 통제력을 잃고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0여 년 전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AI 기술이 인류 문명 최악의 사건이 될 수 있다”며 AI의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AI 기술이 2008년과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최근 국내 은행 및 글로벌 금융사들이 AI 해킹 제물이 된 점은 이런 우려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준다.
AI 규제론은 AI 시장 추가 진입을 막으려는 빅테크 기업의 의도적 견제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하지만 제동장치 없는 AI 폭주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불수의적 전제주의 출현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
역사의 종말 국면에서 무력하게 서 있는 최후의 인간으로 전락하기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사한 범지구적 AI 대응 협력체를 세우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AI 통제를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에 실패하면 인류의 역사는 정말 예상치 못한 비극적 결과를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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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문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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