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화지에 검푸른 점 하나가 찍히니 드넓은 산정 초원은 산수 절경으로 화한다. 우묵한 바닥, 조금 찌그러진 듯한 원형 연못이 비경을 완성한 화룡점정이다. 계절의 생명력을 뽐내듯 푸르른 정상은 일대 봉우리를 굽어볼 만큼 높고 그 흔한 소나무 한 그루 없이 시야가 확 트였다. 강원 정선군의 민둥산(1,118.8m)이다. 전국에 벌거숭이 민둥산이 많지만 이곳은 본명이 민둥산이다.
가을이 오면 이 너른 들판은 황금빛 억새로 가득 찬다. 본래 민둥산의 제철이 가을로 여겨진 이유다. 그러나 근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민둥산의 여름이 주목받고 있다. 그 어느 계절보다 선명한 푸른색으로 물드는 풍경이 사람들의 감성을 사로잡은 것.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돌리네 연못은 억새밭을 뛰어넘는 민둥산의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연초 SNS상에서 가장 주목받은 산이 관악산이라면 지금은 민둥산이 왕좌를 넘겨받았다.
여름 산이 된 가을 억새 명소 민둥산
평소 등산을 즐겼던 중장년층은 물론 2030세대와 외국인 관광객까지 민둥산을 찾는다. 현지 주민에 의하면 “요즘은 별다른 행사도 없는데 예년 (억새)축제 기간만큼 매 주말 등산객이 몰린다”고. ‘가을에 타는 산’ 민둥산이 ‘여름이 가기 전 꼭 올라야 할 산’이란 타이틀까지 거머쥔 셈이다.
민둥산에 나무 대신 억새밭이 자란 이유는 일대가 화전민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해발 1,000m를 넘는 첩첩산중에서 산촌 주민들이 생계를 꾸릴 방법은 삼림을 태운 땅에 작물을 심고 장작을 패고 나물을 캐서 파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별미가 된 곤드레(표준명 고려엉겅퀴)도 민둥산에서 재배되던 화전작물 중 하나. 1968년 전국적으로 화전이 금지되기 전까지 민둥산 일대는 해마다 불이 놓였고 나무는 자랄 수가 없었다.
생존을 위한 사투에도 민둥산은 비옥한 농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선, 태백, 삼척 일대가 그렇듯 민둥산도 물을 머금지 못하는 석회암 지대인 탓이다. 당시 산에 불을 놓던 이들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원망스럽던 석회 땅은 수십 년이 지나 지역민을 먹여 살리는 명소가 됐다. 요즘 관광객이 민둥산을 찾는 이유가 된 돌리네 연못부터가 석회 땅이 깊게 파인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능선이 폭격이라도 당한 듯 움푹 파인 이 돌리네는 지표면 아래 석회암 지반이 빗물과 지하수에 녹아 가라앉으며 형성됐다. 말 그대로 ‘땅이 꺼져’ 생긴 구덩이로, 석회암이 용해되면서 형성되는 지형을 뜻하는 카르스트(Karst)의 일종이다. 이 구덩이에 빗물이 고여 차오른 것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돌리네 연못이다. 용출수가 아닌 빗물로 이뤄진 못이라 강수량이 적으면 마르기도 한다. 반대로 강수량이 많은 계절에는 물이 차오른 못을 볼 확률이 높다.
그래서 민둥산은 여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가야 한다고 한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살랑이는 억새는 장관이지만 이맘때면 기후가 건조해 돌리네 연못이 말라 있을 때가 잦다. 물이 마른 돌리네는 다소 심심하다. 반면 강수량이 풍부한 여름에는 연못이 마를 틈 없이 계속해서 물이 차오른다. 평범한 석회산 중 하나로 남을 뻔한 민둥산이 하늘이 찍은 화룡점정에 감성 충만한 명산으로 변한다. 여름 들판의 쨍함과 연못의 그윽함, 함께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한 쌍이다.
예쁜 풍경과 험한 등산길둥글둥글 무해한 어감과 달리 민둥산은 꽤나 오르기 힘든 산이다. 30도에 달하는 급경사는 예사, 땅에 단단히 박히지 않은 돌멩이가 등산로에 산재해 위험하기도 하다. SNS에서는 ‘인생샷’을 찍겠다며 멋모르고 등반에 나섰다가 혼이 빠진 이들의 후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체력 약한 등산 초보자라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것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그늘도 사라져 뙤약볕도 이겨내야 한다. 애초에 정상 봉우리의 해발고도가 1,000m가 넘는다. 많이들 오르는 관악산(632.2m), 인왕산(338.2m)보다 훨씬 높다.
다행인 점은 등산로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점. 돌리네와 여름 들판을 보기 위해 민둥산행을 결정한 일반 관광객이라면 발구덕마을에서 출발하는 길이 수월하다. 해발 850m 언저리에 위치한 발구덕마을까지 차량으로 이동해 등산을 시작하는 경로다. 발구덕은 ‘여덟(팔) 개의 구덩이(구덕)’라는 뜻으로 산 정상의 돌리네와 같은 카르스트가 8개 분포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초입 경사는 다른 길과 다름없이 가파르지만 등산에 서툰 기자도 3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굳이 정상에 오르지 않고 돌리네를 감상하는 것이 목표라면 20분이면 연못이 보이는 능선에 오를 수 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 ‘돌리네쉼터’를 검색하면 등산로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주말에는 차량 진입이 통제돼 보다 먼 능전마을에서 출발해야 한다.
가장 정석적인 등산로는 민둥산역 인근 중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경로다. 도중 급경사길, 완경사길로 갈리는데 어느 길을 택하든 편도 2시간은 족히 소요된다.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길은 아니지만 등산을 즐기는 애호가는 도전해 봄 직하다.
발구덕 등산로에서 마지막 능선으로 향하는 계단길은 들꽃이 아름답다. 초여름에는 산비탈 나무 계단 양옆으로 금계국과 개망초가 즐비하다. 달큼한 향기에 이끌린 나비와 꿀벌도 북적인다. 제아무리 요즘 사람이 많이 찾는다 해도 민둥산의 진짜 주인은 이들이다. 도시에서는 자취를 감추더니 온통 이곳으로 피난했나 싶다. 이따금 왱왱거리는 벌 소리가 무서워 발걸음을 떼기 망설이는 등반객도 있지만 정작 벌은 지천으로 널린 꿀을 따느라 사람은 안중에 없다.
민둥산은 수도권에서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오전 7시 34분, 9시 51분 민둥산역행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한다. 각 열차편 도착시간은 오전 10시 46분, 오후 12시 41분. 오후 3시 24분, 4시 48분, 7시 53분 민둥산역에서 출발하는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복귀할 수 있다.
산비탈길에 세운 8층 석탑보다 여유롭게 일정을 계획했다면 인근 관광지를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대표적으로 만항재, 운탄고도, 정암사가 있다. 세 곳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계절이 각기 다르다. 국내에서 차량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만항재는 겨울 설경이 유명하다. 하이원리조트 케이블카를 이용해 오를 수 있는 운탄고도는 오뉴월 꽃밭과 가을 단풍이 절경이다.
여름 민둥산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은 정암사다. 민둥산역에서 차량으로 15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정암사는 산비탈에 우뚝 선 8층 석탑 수마노탑(국보)이 핵심인데 한창 식생이 우거질 여름에 가장 신비롭게 보인다. 탑 내부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법당 내부에 불상을 두지 않고 탑 방향으로 창을 내 탑을 향해 불공을 드린다. 정암사 부지에 ‘수마노탑 10분’이라는 팻말이 있긴 한데 이 길 역시 경사가 만만찮다. 사찰 일대 계곡은 열목어 최남단 서식지로 쳔연기념물(정암사 열목어 서식지)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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