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동쪽에 있는 사이나이 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황량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세계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이곳은 모세가 야훼에게서 십계명을 받은 곳으로 그 일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장소에 ‘성 캐더린 수도원’이 서 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라빗 엘 카딤’(노예의 언덕)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고대 이집트의 튀르키에 옥 광산이 있던 곳으로 이 옥의 여신 하토르를 섬기는 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다. 1905년 이곳을 답사하던 영국의 유명 고고학자 윌리엄 페트리는 이곳이 하토르의 신전임을 알리는 이집트 상형 문자 밑에 한번도 보지 못한 문자 30여개를 발견했다.
그는 이것이 이집트 상형 문자를 단순화시켜 음을 표기하는 표음 문자임을 직감했다. 그의 직감은 훗날 사실로 확인된다. 여기서 발견된 문자중에는 소의 머리와 집의 모양을 단순화한 ‘알레프’와 ‘바이트’도 있는데 이것이 지금도 쓰이고 있는 A와 B의 조상이다. 알파벳은 이렇게 탄생했다.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쓰였을 십계명 탄생지가 가장 오래된 알파벳 탄생지 옆이라는 게 흥미롭다.
그 후 9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1993년 존과 데보라 다넬 부부는 이집트 테베 인근 ‘와디 알 홀’(공포의 계곡)의 절벽에서 역시 유사한 문자를 발견했다. 두 문자 모두 기원전 20에서 19세기경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자들은 히브리 알파벳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이 문자가 전세계 적으로 퍼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페니키아 인이다. 전 지중해를 상대로 당시 금보다 비쌌던 자줏빛 물감(Tyrian Blue) 등을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여러 민족의 복잡한 언어를 소리나는 대로 손쉽게 적을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고 그 결과 페니키아 알파벳을 발명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차용해 자음밖에 없던 페니키아 알파벳 문자 일부를 모음으로 바꿔 처음으로 자음과 모음이 완비된 알파벳을 창안했다. 이는 훗날 로마로 건너가 영어를 비롯한 모든 유럽 알파벳의 기원이 된다.
알파벳은 서쪽으로만 이동한 것은 아니다. 이는 이란의 일파인 소그디아로 넘어갔다 투르크 족을 통해 중앙 아시아 전역으로 번졌다. 13세기 중앙 아시아의 나이만국은 투르크 족의 일파인 위구르로부터 알파벳 문자를 배워 쓰고 있었는데 징기스칸이 이곳을 쳐들어 갔다가 복잡한 한자와 달리 소리나는 대로 적는 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포로로 잡은 위구르의 서기 타타 통가로 하여금 몽골어에 적합한 문자를 만들게 했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티벳의 승려 파스파로 하여금 티벳 문자에 근거한 새로운 몽골 알파벳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파스파 문자다.
이 문자는 13세기부터 100년 이상 사실상 원의 지배를 받은 고려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이다. 그는 ‘울루스 부타’라는 몽골 이름으로 개명했을 정도로 친 몽골주의자로 원나라 천호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조선이 들어선 이후에도 몽골어에 정통한 사람은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일조한 신숙주다. 몽골의 파스파 문자는 일부 모양이 한글과 유사한 점 등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한글의 모양은 발음할 때 입과 혀 모양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해설이 있는 만큼 이는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높다.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베꼈다는 주장은 근거도 없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반대로 한글은 세계 다른 문자와 아무 관련이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설도 신빙성이 없다. 일부에서는 아예 집현전 학사들도 제쳐두고 세종대왕 혼자서 다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세종을 숭배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국사를 돌보기에도 바쁠 임금이 혼자 일을 다 하는 동안 학사들은 놀고먹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인류가 이룬 모든 업적들은 그 전대가 쌓아 올린 업적을 토대로 이룬 것이다. 한글을 창제할 때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당시 존재하고 있던 주변국의 언어 체계를 모두 조사해 최선의 방책을 찾아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책잡힐 일이 아니다. 페니키아 알파벳을 받아들여 더 완전한 알파벳을 만든 그리스인이나 몽골 알파벳을 참고해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글을 창제한 일이나 모두 칭찬받을 일이다.
뉴턴은 “내가 멀리 볼 수 있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한글과 세종대왕도 마찬가지다. 한글날을 맞아 ‘세라빗 엘 카딤’에서 한양까지의 멀고도 먼 길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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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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