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서 옛날 글을 정리하다가 발표하지 않은 독후감 한 편을 발견했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을 읽고 쓴 글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울림이 얼마나 컸던지 ‘인디언들의 삶이 읽는 내내 감동의 물결로 나를 출렁거리게 했다’라는 글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한 인디언 소년이 부모를 여읜 다섯 살 때부터 그를 거두어 주신 조부모가 돌아가신 열 살 때까지, 체로키족의 삶과 지혜를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린 이야기다. 당시 이 책은 작가가 테네시 산골의 체로키족 거주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이자 실화로 소개되었다. 주인공 ‘작은 나무’라는 이름 역시 작가 자신의 인디언 이름이라고 했다.
몇 년 뒤, 나는 믿기 어려운 기사를 접했다. 체로키족 혼혈 작가로 알려진 그의 정체는 완벽하게 조작된 가면이라는 폭로였다. 그의 본명은 아사 카터. 앨라배마 출신의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인종 분리주의 정치 선동가였으며 KKK 조직에도 가담한 인물이었다. 차별과 억압의 세월을 견뎌온 인디언의 수난사를 절절한 문장으로 그려낸 이가, 정작 현실에서는 다른 인종의 존엄을 짓밟은 자라는 사실 앞에서 말문을 잃었다. 믿고 기대어 온 나무가 속부터 썩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버린 듯한 배신감이었다. 마음을 적시는 문장 뒤에 숨은 작가의 위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동안 그 책을 떠올리는 일이 괴로웠다.
독후감을 다시 읽어보며 문학 이론가 롤랑 바르트가 선언한 ‘작가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작품은 세상에 나온 순간 작가의 의도를 떠나 독자의 해석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작품이 작가에게서 독립된 생명을 얻듯, 문학이 언제나 작가의 인격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은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는 정의를 말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 말을 수긍하면서도 완전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났다고 해서 그 글을 쓴 사람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글과 삶이 무관하다면 우리가 굳이 진심을 다해 글을 쓸 이유가 무엇인가. 거짓된 삶도 그럴듯한 문장으로 얼마든지 포장될 수 있다면 글쓰기는 결국 정교한 언어 기술이나 자기 포장에 지나지 않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글이 곧 삶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
그 믿음 때문일까, 글을 쓴다는 일이 새삼 두려워진다. 내 글이 내가 살아내는 삶보다 앞서갈까 봐, 수려한 문장으로 내 삶을 포장해 버릴까 봐. 글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아닌 사람을 감추는 가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삶과 글을 완벽히 일치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 둘 사이의 거리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쓴 대로 다 살지 못함을 잊지 않고 그 간격을 조금씩 좁혀가는 것, 그것이 작가로서 붙들 수 있는 최소한의 성실함이라 믿는다.
오래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책장에서 찾아낸다. 속이 썩어버린 나무를 알아버린 지금도, 책 표지의 ‘작은 나무’ 눈망울은 여전히 맑다.
<
성민희 수필비평ㆍ소설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