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시계’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앤 타일러(Anne Tyler)의 작품이다. 원제는 ‘숨쉬기 연습(Breathing Lessons)’이지만 한국어판에서는 ‘종이 시계’로 번역되었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유머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을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토요일 아침 8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단 14시간 남짓이다. 결혼 28년째인 메기와 아이러 부부는 친구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볼티모어 집을 떠나 펜실베이니아로 향하는 자동차 여정에 오른다.
그 여정에서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에게 깊이 의지한다. 남편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아내는 그 특유의 성격대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과묵한 남편은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만 결국 아내를 기다려 준다. 장례식장에서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메기는 아들과 이혼한 며느리가 재결합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짧은 하루의 여정 속에서 부부가 함께 살아온 세월과 서로를 향한 복잡한 감정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물들의 성격과 과거, 현재의 심리가 워낙 선명하게 묘사되어 마치 주인공이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듯하고, 문득문득 그 모습에서 나 자신의 자화상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주인공인 48세의 메기는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노인요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해 온 평범한 중년 여인이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어디서나 잘 적응한다. 반면 남편 아이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의사의 꿈을 품었으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은 인물이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18살 때 꿈꾸던 삶과는 판이한 현실에 내심 실망하고 있다.
아내 메기는 한때 꿈꾸었던 낭만적인 결혼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현재의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남편 아이러는 자신이 삶을 낭비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한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늘 말이 없고 혼자 카드놀이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다. 자식들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들은 무명 록 가수인데, 한 소녀를 임신시키고 아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이혼했다. 딸은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에 진학하지만 은근히 부모를 무시하고, 손녀는 그들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다.
메기는 그렇게 아옹다옹 살아가면서도 남들이 자신의 결혼 생활을 부러워할 것이라 믿었지만, 일찍 이혼한 전 며느리는 “아버님은 항상 자기만 옳다고 하고, 어머니는 뻔히 틀렸어도 고칠 생각을 안 한다”며 이들 부부를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한다.
제목인 ‘종이 시계’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실제로 종이시계를 만드는 에피소드에서 비롯된다. 결혼 일주년 기념으로 종이로 만든 선물을 주면 좋다는 말에 메기가 직접 만들어 보지만 종이가 자꾸 말려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결국 버리게 된다.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종이 시계는 뜻대로 되지 않았던 그들의 결혼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종이 시계는 버려졌지만,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도 그들은 다시 서로의 곁으로 돌아온다.
성격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외롭고 지쳐 있다. 어디서부터 삶이 어긋났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메기는 남편을 껴안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나지막이 속삭인다. “다 잘될 거예요.”
큰 사건이 없는 평범한 하루를 그리면서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복잡한 마음이 섬세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인간이 어떻게 인내하고, 서로 방해하고, 적응하고, 포기하고, 그리고 아침에 어떻게 다시 시작하는 지”를 묘사한다고 했다.
삶은 젊은 날 그려보았던 모습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메기와 아이러도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주면서, 또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낸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함께 맞는 아침에는 아직 작은 희망이 남아 있다. 30년 가까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삶이 보인다. 서툴고 버거워도 다음 날 아침을 다시 맞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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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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