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개월 만에 대미투자 윤곽 불구
▶ 합의 없이 LNG 투자 일방 발표
▶ 한미 팩트시트엔 포함 안돼 논란
우리나라가 미국에 20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의 대미 투자 프로그램이 1일 확정됐다. 지난해 7월 한미가 관세 협상을 타결한 지 14개월 만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관세를 15% 이상으로 높이지 않는 조건 중 하나로 대미 투자를 요구했다.
하지만 대미 투자 협상을 주도한 정부 부처 내부에서는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전체 투자 사업의 개괄적인 개요도가 나왔을 뿐 앞으로 처리해야 할 협상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 미국은 한국과 합의되지 않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게임의 법칙을 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월 30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텍사스 엔시날 액화천연가스(LNG) 복합화력발전소, 미국 내 대형 원전 8기 건설, 알래스카 LNG 사업 등을 담은 대미 투자 내용을 발표하면서 “알래스카 투자 규모는 500억 달러 이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양국이 공동 발표한 팩트시트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X(옛 트위터)를 통해 “미국이 발표한 대미 투자 사업 중 알래스카 LNG 사업은 상업성이 확인되고 대한민국의 법 절차에 부합하는 것을 전제로 착수하기로 했다”고 즉각 반박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벌써부터 미국이 합의하지도 않은 내용을 공개 발언했다”며 “다가올 협상도 부담 요인이 많다”고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식 발표 이후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오늘의 발표는 끝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원화로 272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 사업의 큰 틀이 짜였을 뿐 세부 내용을 채우고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풀어야 할 매듭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도 이어질 협상에서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대미 투자 사업은 미국의 정치·정책 환경에 따라 사정이 달라질 여지가 크다”며 “미래 불확실성을 감안해 투자 한도 전체를 한번에 활용하기보다 일본처럼 투자금의 여분을 남겨두는 것이 나았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00억 달러 투자 한도를 한꺼번에 전부 공개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전체 약정 투자 금액(5500억 달러) 중 80% 이상을 남겨놓은 상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통상연구원장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염두에 두고 알래스카 LNG 사업을 의도적으로 부각한 점을 지적하며 “세부 협상에서 미국의 정치 일정에 맞춰 끌려가지 말고 상업적 합리성과 한국 기업의 참여 조건을 꼼꼼하게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당장 주어진 사업들의 상업적 합리성을 높은 수준으로 수십 년간 유지할 수 있는지부터가 난관이다. LNG 복합화력발전소는 통상 40년, 대형 원전은 60년 이상 설비를 운영하는 것이 보통이다. 알래스카 LNG 사업은 구체화될 경우 사실상 유전이 바닥날 때까지 사업을 지속해야 한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수십 년 뒤 새로운 기술이 나와 LNG와 원자력을 대체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장기간 사업을 일궈나갈 거버넌스를 제대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업계의 한 관계자 역시 “경제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LNG 가격, 미국 내 전력 소매가격 등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상업적 검토는 사전적 성격이고 실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인허가와 지역 주민의 반대로 대형 인프라 공사 진행에 따르는 불확실성이 많다는 점도 문제다. 김 교수는 “공사비가 늘고 일정도 지연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며 “우리가 비용을 더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사업 자체의 경제성이 떨어지고 원리금 회수 기간이 길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 역시 “최악의 경우에는 사업을 청산해야 하는 경우도 염두에 두고 플랜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매년 최대 200억 달러씩 지출될 투자 자금도 향후 10년간 꾸준히 외환시장에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외환보유액의 운용 수익과 한미전략투자공사가 해외에서 발행하는 연 70억 달러 한도의 공사채로 비용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채권 및 외환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기는 어렵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율 방어에 필요한 정책 수단이나 외환 유동성을 약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투자 자금을 집행해야 한다”며 “최근 고금리 환경으로 변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조달 비용 증가도 걱정이 된다”고 분석했다.
1500억 달러 규모의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협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대형 원전 건설과 마스가 투자의 경우 안보 협상과 엵혀 있기도 하다. 정부는 핵농축 권한 확대와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놓고 미국과 의견을 조율 중인데 이 과정에서 마스가 협상의 세부 내용이 채워질 수 있다. 한국이 핵잠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미국 군함을 함께 만들거나 핵농축을 허용하는 대신 미국산 핵연료 수입을 늘리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지난해 양국 정상이 만난 뒤 발표된 ‘공동 설명 자료(조인트 팩트시트)’에도 조선업과 원자력 분야는 군함·핵농축·핵잠과 함께 ‘해양 및 원자력 분야 파트너십 강화’로 함께 묶여 있었다.
반도체 설비투자 역시 미국이 압박 수위를 높일 수 있는 영역 중 하나다. 일단 20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이미 한도가 다 채워져 반도체 설비에 투자할 수 없지만 미국은 여전히 한국 기업의 그린필드 투자를 원하는 분위기다. 반도체 품목관세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를 빌미로 기업에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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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현ㆍ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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