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영수 여사 피격’ 꼬리 문 의혹
▶ 문세광 “조총련 사주” 거듭 인정
▶ 美대사관 “직접 증거 없다” 보고
▶ 김종필 측 설명에도 배후설 의문
▶ 문세광 범행 넉달 만에 사형 집행
▶ “부실수사 은폐하려 서둘러” 의심
▶ 日경찰도 “조총련 연관성 못 찾아”
▶ 학계 “기록 공개로 논란 종식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은 도입부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구체적 사건은 일부 다르게 각색됐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저격범 문세광 배후에 친북 성향 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있다는 사법적 결론에 도전하는 듯한 극중 내용은 적잖은 논란을 낳고 있다.
문세광이 "조총련에 속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50년도 넘었고, 그의 자백으로도 뒷받침되는 사법적 결론을 뒤집을 만한 증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럼에도 사건 배후를 둘러싼 음모론은 불식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사건 발생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여파를 잠재우려 수사 결과를 날조했다는 주장이 나왔을 만큼 그 뿌리도 깊다. 반세기 넘는 음모론의 기원은 뭘까.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확인되는 외교문서와 판결문, 과거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당시 수사 과정을 복기하며 그 단초를 짚어봤다.
사건 발생 사흘째인 1974년 8월 17일, '박대통령저격사건 수사본부'는 단독 범행을 주장하던 문세광이 "조총련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고 범행 자금을 전달받았다"고 자백했다고 발표한다. 조총련 간부 김호룡이 문세광 윗선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주한 미국대사관은 9월 4일 본국 국무부에 보낸 보고문에 "한국 정부는 사건을 기본적으로 문세광의 자백에 근거하고 있다"며 "그의 자백은 독립적 정보원들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고, 그가 실제로 얼마나 깊이 연루됐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있다"고 적었다. 문세광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때로 모순된다고도 보고했다. 한국 측 설명대로 조총련이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이를 뒷받침할 직접 증거는 없다는 게 미국 측의 당시 판단이었다.
이런 외교문서의 존재는 "유신정권하 수사기관이 책임을 외부로 돌리려고 사건 실체를 왜곡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키웠다. 김종필 총리가 비서 한상국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보내 수사 내용을 설명했음에도 미국 측 의문을 말끔히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도 음모론의 자양분이 됐다.
수사본부가 사건 발생 9일 만인 8월 24일 문세광을 송치하고, 서울지검은 19일간 추가 수사 후 9월 12일 문세광을 기소한다.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로 위장, 광복절 기념 축사를 낭독하던 박 대통령을 향해 권총 네 발을 쐈고 그중 한 발이 육 여사를 숨지게 했다는 혐의였다.
1심 첫 공판은 10월 7일 열렸다. 수의에 4428번 미결수번호를 달고 나온 문세광은 공소사실을 순순히 시인했고, '김호룡이 개인 돈으로 (범행자금을) 준 것이라 생각하느냐'는 검찰 질문에 "조직을 통해 나온 돈이란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조총련 의장을 잘 안다고도 밝혔다.
12일 뒤인 10월 19일 1심 법원은 문세광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1월 20일 항소심 결론도 다르지 않았고, 대법원은 12월 17일 형을 확정했다. 사흘 뒤인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울구치소에서 문세광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범행의 중대성을 감안해도 사건 발생 4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되는 건 극히 드문 일. 사형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황산덕 법무부 장관이 집행명령 결재를 꺼렸다는 전언도 흘러나왔다. 그러자 일각에선 "부실수사 은폐를 위한 속전속결식 처리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됐다.
한국 수사당국은 일찍이 일본 측에 김호룡 등 공범에 대한 강제수사를 요구했지만, 일본 경찰은 "한국인이 한국에서 벌인 일에 일본법을 적용할 근거가 없다"며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조총련과 문세광을 연결 짓는 한국의 수사 내용에 여러 모순이 있다"며 맞받기도 했다.
일본 측 수사가 활기를 띤 건 10월 말이 돼서였다. 박 대통령이 '공범 신병인도 및 조총련에 단속 강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며 일본과 단교를 고려할 만큼 한일 관계가 경색된 상황이었지만, 일본이 김호룡 등에 대한 단서를 확보했다는 소식에 사건 전모가 밝혀질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문세광 사형 집행 후인 12월 25일 일본 경찰이 수사를 종결하며 내놓은 결론은 한국의 예상과 크게 달랐다. 문세광이 김호룡 등 조총련 인사들과 연하장을 주고받을 정도로 긴밀한 사이인 건 맞다고 판단하면서도 "(이번 사건에서) 연관성은 밝혀낼 수 없었다"고 한 것.
1973년 일본 본토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반한 감정이 커진 일본이 사건을 축소시킨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지만, 이런 발표는 한국 측 수사 결과의 신빙성에 흠집을 내는 빌미로 작용했다. 악화일로를 걷던 한일관계는 이듬해 9월 한일각료회담이 개최되며 정상화됐다.
그럼에도 한국의 수사 결과를 폄하할 수 없는 건, 문세광 스스로 조총련의 사주를 받았다고 수차례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 당일엔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 참회하기도 했다. 문세광 변호인 또한 재판에서 "배후와 공범이 따로 있는데 일개 하수인에 불과한 피고인에게 극형을 선고한 건 형평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런 진술이 강압수사의 결과라면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겠지만, 그런 정황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는다.
역사학계에선 투명한 기록 공개로 음모론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강성현 성공회대 평화월딩연구소 소장은 "영화의 (박정희 정권) 자작극 암시엔 근거가 없지만, 그렇다고 사건 실체가 다 밝혀진 건 아니다"라며 "현장 감식 자료,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기록 등이 더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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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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