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 한 가족이 이민을 왔다. 부인은 서울 종로에서 성장한 꿈이 많았던 소녀였다. 그는 해외 특파원이 되고 싶은 꿈을 꾸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그의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올 수 있었다. 미국에 적응하는 동안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낯선 이곳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이었다. 특히 요리를 좋아하여 훗날 식당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남편은 한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분이었다. 성품이 정확했고 철저한 분이었다. 이민을 와서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리건주는 산림 산업이 발달한 곳이라 제재소에서 일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직장은 육체적으로 중노동이 필요했다. 몇 년 동안 버티며 직장 생활을 한 후 부부는 시내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서 식당을 운영하기로 했다. 새벽에 가게로 나와 음식을 준비하고 밤늦도록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유로웠다.
부인의 맛난 음식을 즐겨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 생겼다. 식당은 그런대로 잘 운영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두껍기는 했지만 밝은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부부의 친절에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은퇴를 앞두고 거처할 집도 마련하고 생활도 안정되었다.
어린 두 딸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부인은 시모님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잘 보살폈다. 큰 딸은 결혼 후 출가하고 둘째 딸은 미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잘 영위해 나갔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과 두터운 이국 문화의 벽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고국에 대한 향수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단조롭게 지나든 어느 날 남편과 말다툼하던 중 부인이 냉장고에 몸이 부딪히면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구급차가 달려와 입원하여 허리를 수술받았다. 수술 후에도 잘 회복되지 못하고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앉고 일어서는 일도 점점 어려워졌다. 마음대로 활동할 수도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은 큰 죄를 지은 심정이었다. 본의 아닌 일이지만 아내가 넘어져 다친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더 힘들어했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응급실을 다녀오고 병원 치료에도 별 진전이 없었다.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다리가 붓고 장딴지 근육이 돌처럼 단단해졌다. 그해 가을 남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누운 남편은 잠든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부인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식당을 운영하며 고단할 때보다도 더 힘들었다. 그는 편지 한 장을 썼다.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여보 잘 못했어요…” 편지를 몇 번 접어서 누워있는 시신의 가슴에 꽂아 주었다. 시신을 옮기려 온 장례 위원들에게 시신과 함께 그 편지도 묻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지막 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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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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