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햇살 아래 계절이 무르익어 간다. 계절의 깊이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숙련의 내공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낡은 가방과 구두를 전문적으로 수선하고 복원하는 달인의 일상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세월의 흔적을 비껴갈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달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으면, 버려지기 직전의 낡은 물건이라도 본래의 온전한 모습으로, 때로는 이전보다 더 고풍스러운 자태로 환골탈태했다. 화면 속 조명이 집중된 달인의 손가락에는 지문마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다. 손마디에 깊게 패인 상흔과 굳은살은 수많은 의뢰인이 보낸 깊은 신뢰의 증표였다.
만만치 않은 수리 비용에도 불구하고 굳이 낡은 물건을 들고 달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단지 물건을 버리지 못해 새로 단장하려는 것은 아닐 터다. 물건의 형태를 넘어, 그 속에 스며든 특별한 추억과 지나온 시간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까닭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볼품없이 낡은 물건일지라도, 주인에게는 삶의 소중한 여정을 함께한 동반자다. 첫 선물이나 입학, 졸업의 순간, 혹은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남기신 유품처럼 저마다 깊은 사연을 품은 물건들은 의뢰인의 지나온 삶을 오롯이 증언한다. 결국 물건을 수선하는 행위는 물건에 새겨진 시간의 가치를 공유하고, 지나온 자신의 삶과 기억을 정성껏 갈무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얼마 전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오랫동안 손때가 묻어 낡아진 필자의 성경책을 가죽으로 리폼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필자의 수필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최근 복원 관련 비즈니스를 시작한 지인의 언니가 정성껏 단장해 전해 온 소중한 선물이었다. 여러 권의 성경책을 소유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필자와 함께한 그 성경책은 특별히 애정이 가는 책이었다. 얼마 뒤 세상에 하나뿐인 모습으로 재탄생한 성경책을 마주했을 때 마음이 남달랐다. 정교하고 섬세한 손길이 닿은 곳마다 정성과 마음이 온전히 담긴 게 느껴졌다. 지인은 왜 이 성경책을 그토록 아꼈는지 이제야 알겠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 단장한 성경책을 품에 안으며 오래된 물건의 가치를 살리려는 의뢰인들의 마음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에 대한 애착을 넘어선 일이었다.
물건은 주인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증언하는 침묵의 증인이다. 버려질 뻔했던 물건이 달인의 손길을 거쳐 새 생명을 얻듯, 우리도 세상의 폭풍에 긁히고 상처받은 내면을 조용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진정한 자신과의 대면을 기피하거나 회피하곤 한다. 마음의 창고에 방치된 채 잊힌 관계나 마음의 파편들은 없는지 잠잠히 들여다보자. 오래된 물건의 흠집을 매만지고 가치를 새로 입히듯, 우리 내면의 남루해진 흔적들을 대면하고 정성껏 수선해 보면 어떨까. 깊어 가는 가을 햇살이 자늑자늑하게 내려앉는다.
<박영실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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