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해무가 드리운 숲 바닥은 넓적한 고사리가 온통 뒤덮었다. 촘촘한 고사리 사이로 흙바닥이, 빽빽한 단풍목 가지 사이로는 잘개 쪼개진 햇살이 비친다. 현재 시간은 새벽 6시, 제아무리 인기 있는 관광지도 북적이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이다. 바닷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수목원 중 하나인 이곳도 마찬가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58만9,429㎡ 면적의 광활한 수목원에는 입항하는 선박의 뱃고동과 머리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만 겹쳐 울린다.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에서 하루를 시작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한 특권이다. 잘 알려졌듯이 이곳은 ‘바다가 보이는 수목원’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수목원’이다. 염분이 많은 바닷가에 수목원을 만드는 일도, 수목원에서 숙박이 가능한 경우도 드물다. 여기에 ‘귀화 1호 미국인이 설립한 국내 1호 사립수목원’이란 타이틀까지 있어 독특함을 더하는 장소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생을 다한 수목원장
천리포수목원 설립자는 민병갈(1921~2002) 원장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피츠턴에서 미국인으로 태어나 충남 태안군에서 한국인으로 숨을 거뒀다. 해군 정보장교로 복무하다가 1945년 미 군정에 배속돼 광복을 맞은 한국과 연을 맺었다. 재정·경제 업무를 주로 맡은 경력을 살려 제대 후 한국은행으로 적을 옮겨 1982년 정년퇴임했다. 미 군정 재정담당관 재직 당시 한국은행의 민병도(1916~2006)와 만나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깊이 교류했는데, 한국 이름 ‘민병갈’도 민병도의 성(민)과 돌림자(병)를 따서 지은 것이다. ‘갈’은 자신의 영문명 ‘칼’을 자연스러운 한국 이름으로 바꿔 쓴 것. 민병도는 훗날 한국은행 제7대 총재를 지내고 강원 춘천시 남이섬을 현재의 유원지로 탈바꿈시켰다.
혈기왕성한 20대에 타지에 와 현지 사람들과 소중한 연을 맺었지만, 그도 처음부터 한국에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소금 먹은 황토밭이었던 천리포 일대의 땅을 매입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현재의 천리포수목원이 만들어진 계기는 희한하게도 한 농민의 혼수 걱정 때문. 혼기가 찬 딸의 결혼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지역 농민이 여름이면 태안으로 피서를 오던 미국인 금융인(한국은행 재직 시절 민병갈)에게 ‘내 땅 좀 사달라’고 청한 것. 바닷가라 토지에 염분이 많고 해풍이 거세 작물도 못 기르던 허허벌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농사를 짓지 못하는 지방 토지는 애물단지였다. 1962년 첫 2만㎡를 매입하니 동네 주민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땅을 팔았다.
땅을 쓸모 있게 하는 게 급선무였던 터라, 천리포수목원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구역이 연못과 송림이었다. 소나무는 거센 해풍과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조림됐고 연못은 식물에게 담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다. 이를 보호막 삼아 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심다보니 어느 순간 어엿한 수목원의 모습을 갖췄고 1970년 정식으로 개관했다. 수목원이 ‘인생 사업’이 된 민병갈은 9년 후 정식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그의 유해도 수목원에 안치됐다.
천리포수목원의 철학은 ‘나무가 주인이 되는 수목원’이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휴양림이나 정원과 구분이 모호한 수목원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납득이 간다. 식생의 성장을 통제하는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수목원의 방침이다. 수목원 해설사는 “소나무담쟁이(송담)가 소나무를 타고 자라면 덩굴을 제거해 줘야 하느냐를 두고 구성원들이 오랜 기간 고민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소나무 외피를 빈틈없이 덮은 덩굴을 보고 ‘제대로 식물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또한 자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 관리한다”고도 했다. 물론 소나무 제선충 등 치명적인 병충해는 사전 방제로 철저히 막는다.
이런 철학 덕분에 수목원은 연구·보전 목적으로 운영되다 설립자 사후인 2009년에야 대중에게 공개됐다. 2007년 12월 지역 최대 관광지인 만리포해수욕장을 초토화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원유 유출 사고’로 지역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자, 천리포수목원을 거점 관광지로 육성해 경제를 부양하자는 안이 나왔다. 그 기대에 부응한 결과 수목원은 매년 2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지로 성장했다.
요즘 같은 초여름, 수목원에서 가장 주목할 공간은 노루오줌원이다. 뿌리에서 독특한 냄새가 난다 하여 이름 붙은 노루오줌은 우리 자생식물이다. 외국에서는 ‘아스틸베(Astilbe)’로 통하며 신부 부케 소재로 쓸 만큼 우아한 꽃으로 대접받는다. 노루오줌원에는 120분류군의 노루오줌을 관람할 수 있다. 흰색, 분홍색, 붉은색, 자주색 꽃이 은은한 파스텔 톤으로 물들인 풍경이 감성적이다. 6~7월이 절정기라 깃털 같은 꽃차례가 무더기로 피어오르고 있다. 논과 같은 습지에 식재돼 있어 개구리밥 등 습지식물도 만날 수 있다.
연못에선 수련과 연꽃이 개화를 시작했다. 수목원 공개 구역인 ‘밀러가든’(6만5,623㎡)에서 동선의 중심을 이루는 큰 연못과 작은 연못은 식물에 담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로 조성됐지만, 지금은 수목원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히는 공간 중 하나다. 수련이 수면을 덮기 시작하면 낙우송이 드리운 그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두 연못 사이에는 작은 논이 있다. 오리 농법으로 관리하는 논으로 솜털이 뽀송하게 오른 새끼 오리들이 최근 농부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수목원에서 하룻밤 보내고‘비공개 구역’ 탐방까지
천리포수목원의 진가는 ‘가든스테이’에서 드러난다. 천리포수목원 내에는 숙박이 가능한 주택 건물이 7채 있다. 수목원 초기부터 함께한 기와집, 초가집, 천리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양옥집 등이다. 기와집을 원한다면 호랑가시나무집·벚나무집·배롱나무집·해송집을, 초가집을 원한다면 다정큼나무집을, 바다가 보이는 ‘오션뷰’ 양옥을 원한다면 위성류집과 사철나무집을 선택하면 된다. 각 가옥의 이름은 가장 가까운 곳에 심긴 나무에서 따왔다.
건물이 수목원 부지에 있기에 숙박객은 일반 운영시간(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외에도 언제든 수목원을 둘러볼 수 있다. 이런 혜택은 특히 해가 긴 여름에 빛을 본다. 해가 뜨고 4시간은 지나야 첫 일반 관람객이 입장하고, 마지막 관람객이 퇴장하고 2시간이 지나야 해가 지니, 인파가 사라진 수목원을 꽤 오랫동안 호젓하게 ‘전세 관람’할 수 있는 셈이다. 새벽 안개가 깔린 수목원, 해 질 녘 불그스름한 노을이 내린 수목원을 유유자적하는 경험은 다른 수목원에선 하기 어렵다.
‘아침산책’ 프로그램도 가든스테이 숙박객의 특권이다. 일일 선착순 12명 제한으로 수목원의 비공개구역을 탐방할 수 있다. 수목원 외부에 위치한 ‘에코힐링센터’ 숙박객도 신청 가능하다. 천리포수목원 전체 면적 가운데 공개구역(밀러가든)은 11% 남짓. 90%에 가까운 비공개 구역의 일부를 해설사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것. 기자가 현장 취재를 한 날은 수목원의 대표 비공개구역인 ‘목련원’을 중심으로 걸었다. 목련 철이 한참 지났는데도 사람 머리만 한 거대한 넓은잎목련 등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설립자가 미국에서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기 위해 지은 목련집도 목련원의 볼거리다. 겉모습은 기와 얹은 전통 한옥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서양식 욕실과 생활 설비를 갖췄다. 미국인 노모가 낯선 타지에서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안팎의 양식을 달리한 것. 집 이름처럼 앞마당에는 큰 백목련이 자란다.
매서운 파도가 깎은‘인생샷’ 포인트
천리포 수목원에서 1박 2일을 보냈다면 인근 파도리 해식동굴에 꼭 들르길 권한다. 수목원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6㎞가량 떨어져 있어 차량으로 15분 정도 소요된다. 지명이 파도(波濤)일 만큼 매서운 물길과 암초로 악명이 높은 지역이다. 고려·조선시대, 남부지방에서 개경·한양으로 향하는 조운선과 사신선이 반드시 지나야 했던 항로였는데, 당시에도 ‘지나가기 극히 어려운 길목’이란 뜻의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렸다.
이 거친 파도가 남긴 흔적이 해식동굴이다. 아름다운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장소다. 거대한 해식동굴 2구를 액자 삼아 반짝이는 서해를, 시간에 따라서는 해를 사진에 담을 수 있다. 바위 기둥으로 두 동굴이 나뉘어 있지만 내부는 하나다. 이 큰 동굴 옆에는 같은 구조의 작은 동굴도 있다. 오직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어 물때 확인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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