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동굴 내부는 화려한 고딕,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유럽 성당에 조각된 장식과 석상처럼 종유석 등 동굴 생성물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반면 용암동굴은 화려하고 정교한 볼거리가 없이 단순하다. 대신 묵직한 압도감이 있다. 흐르던 용암의‘발자국’ 격이라 유기적인 생동감이 느껴진다. 내부를 걷다 보면 거대한 생명체가 투박하게 파놓은 동면굴을 탐방하는 듯하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용암동굴, 제주 북동부 만장굴이 지난달 30일 재개장했다. 2023년 12월 낙석 사고로 전면 폐쇄된 이후 2년 5개월 만에 내부 관람이 허용된 것이다. 현지 주민들조차“만장굴이 다시 열렸어요?”라고 할 만큼 아직은 소문이 덜 났는데도 재개장 첫 주말 이틀간 7,000여 명이 다녀갔다. 그간 달라진 K관광의 위상을 반영하듯 유럽·북미에서 온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낙석·미끄럼 등 위험 방지차 안전시설 보강
2023년 12월 29일 만장굴 출입구 상층부에서 지름 약 70㎝ 암석이 떨어져 계단 난간 일부가 파손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제주도는 곧바로 만장굴을 전면 폐쇄하고 낙석 방지 조치와 함께 안전·편의 시설 개선에 나섰다. 폐쇄 전에도 만장굴은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데다 곳곳에 물이 고여 통행에 주의가 필요했다.
재개장 후에는 약 1㎞ 길이의 공개 구간 전체에 관람 데크를 깔아 바닥이 평탄해졌다. 입구 계단만 지나면 유아차 이용이 가능한 수준이다. 데크길이 자연 지형을 가려 아쉽다는 평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굴이 넓고 바닥이 평탄한 구간에는 데크길을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조명은 종전보다 밝기를 낮춘 저조도 LED로 교체했다. 자연 그대로의 분위기를 살리는 동시에, 이른바 ‘녹색오염’으로 불리는 람펜플로라(lampenflora)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람펜플로라는 조명에 의해 동굴에 조류·이끼·양치류가 번식하는 현상으로, 1960년대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가 훼손되면서 심각성이 부각됐다. 낙석이 발생한 지점과 위험 구간에는 안전시설물을 설치하고 주의 안내판을 배치했다. 매달 낙석·균열·진동 모니터링을 시행하는데 2023년 12월 이후 추가 낙석은 없었다고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밝혔다. 동굴 내부에 온·습도 표시 모니터도 새로 설치됐다.
석회동굴에 종유석이 있듯이, 용암동굴 만장굴에서는 관람구역 끝 지점에 거대한 용암석주가 있다. 높이 약 7.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상층굴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하층굴 바닥에 연결돼 형성된 것으로, 내부는 가스가 빠져 비어 있다. 현무암 용암동굴은 본래 탄산염 동굴 생성물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장굴이나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등 한라산 기슭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거문오름의 용암동굴은 해안사구의 패사(조개껍데기 모래)가 빗물에 녹아 지하로 스며들어 종유석·석순 같은 석회동굴형 2차 생성물이 형성된다. 다른 용암동굴과 구분되는 특징, 이른바 유사석회동굴이다.
이 때문에 동굴 전 구간에 물이 많다. 특히 비가 오면 동굴 안에는 말 그대로 ‘폭우’가 쏟아진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제주도 전역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동굴 탐방을 위해 우산은 필수였다. 한국인 관람객은 대부분 굴 내 우천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가이드를 동반하지 않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낯선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 관광객 요르크 슈웽크(51)는 “유럽에서 여러 동굴을 다녀봤지만 내부에 비가 내리는 동굴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규모도 평소 봤던 동굴보다 현저히 커서 (답답하지 않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다.
재개장한 만장굴의 또 다른 변화는 외국인 관광객 증가다. 인원은 물론 출신국도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중국인 위주였지만 이번에는 독일, 캐나다 등 다양한 국가 관광객을 만날 수 있었다. 2년 반 남짓 만장굴이 문을 닫은 동안 관광지로서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일 터. 연인과 함께 온 네덜란드인 셴도 베닐리아(33)는 “틱톡(영상 중심 SNS)에서 한라산과 만장굴을 다룬 영상을 보고 제주행을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데도 서울, 부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제주로 왔다고.
만장굴이 한국에 두 건뿐인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점도 외국인 관광객이 주목하는 요소. 만장굴을 포함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2007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의 일원이다. 특히 만장굴은 거문오름에서 가장 큰 용암동굴이자 유일하게 일반 관람이 가능한 굴이다. 캐나다에서 온 다르시(60)·리아(61) 거스틴 부부는 “해외여행지를 고를 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목록을 자주 참조하는데, 마침 며칠 전 만장굴이 몇 년 만에 재개장했다는 기사를 읽고 이곳을 찾았다”고 밝혔다.
만장굴은 올해로 발견 80주년을 맞는다. 1946년 제주 김녕국민학교(현 김녕초등학교) 부종휴 교사와 5·6학년생 30여 명으로 구성된 ‘꼬마탐험대’가 현장 탐사로 찾아냈다. 올해는 부종휴(1926년생) 교사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고대 용암지대를 걷는 공원
제주 북서부에도 올해 새로운 용암 관광지가 문을 열었다. 제주시 애월읍의 파호이호이 라바필드파크다. 파호이호이는 하와이어로 ‘부드럽게 흐르다’는 뜻으로, 점성이 낮고 유동성이 높은 현무암질 용암을 가리킨다. 공원은 이름처럼 용암대지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처럼 넓은 용암대지는 주로 해안에서 발견되지만, 이곳은 드물게 중산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공원 용암대지에 발을 들이면 선사시대로 돌아온 것 같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다. 젖은 현무암 일색인 해안과는 사뭇 다른 풍광이다. 거친 흙의 질감이 느껴지는 용암대지에는 척박한 땅을 탐험하는 몰입감이 있다. 용암이 발가락처럼 뻗어나간 라바 토우(lava toe), 빵처럼 부풀어 오른 투물러스(tumulus), 새끼줄 모양의 로피 라바(ropy lava)를 관찰할 수 있다. 탐험에 적합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 왔거나 아이를 동반했다면 공원에서 운동화와 아동용 머리 보호구를 대여해준다.
용암대지 주위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가면 파호이호이 빌리지를 마주한다. 작은 지질 박물관, 카페 등 건물 여러 동으로 구성돼 있다. 카페는 방금까지 탐험했던 용암대지를 한층 낮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차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제주산 말차가 대표 메뉴다.
빌리지를 지나 두 번째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대나무숲. 본래 공원 부지에 넓은 대나무숲을 조림할 계획이었는데, 지반 조사 과정에서 용암대지가 발견돼 개발 계획을 선회했다고 한다. 축소 조림된 이 대나무숲이 초기 계획의 흔적인 셈이다. 숲 사이로 난 산책로 주변에 용암석구 80여 개가 전시돼 보는 재미가 있다.
대나무숲을 지나면 ‘스톤템플’이 나온다. 자갈밭에 거대한 바위 여럿이 무심하게 세워진 기이한 공간이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혼란한 속세를 등지고 죽림에 모여 술과 음악, 청담을 나눈 일곱 선비를 칭하는 ‘죽림칠현’에서 영감을 받아 조성했다고 한다.(바위는 7개보다 훨씬 많다) 바위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가다가 가만히 멈추면 바위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또 다른 소리가 들리는 바위의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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