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취향이 깊어진다는 뜻이고 취향이 깊어진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것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패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날의 패션이 유행을 쫓는 모방이었다면 인생의 황금기인 골든 에이지의 패션은 내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가장 직관적인 언어여야 합니다. 수많은 유행 조각들로 옷장을 어지럽히는 조급함은 이제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진정한 멋은 덜어냄으로써 오히려 깊어지니까요. 내 안목으로 고른 단 하나의 옷이 주는 힘, 온전히 나답고 당당해지는 그 해방감의 시작점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1. 시그니처 아이템.. 매일의 고민을 덜어주는 나만의 일상복
누구에게나 시간과 에너지는 가장 귀한 자원입니다.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오늘 뭐 입지?’ 라는 소모적인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면 아직 나만의 스타일링 기본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검은 터틀넥처럼 매일 똑같은 옷 한 가지만 입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체형적 단점을 세련되게 가려주고 내 장점을 가장 극대화해 주는 나만의 절대 공식을 찾는 일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조금 마른 편이라 왜소해 보이는 게 고민이라면 전체적으로 헐렁한 실루엣을 활용해 볼 수 있습니다. 몸에 붙는 이너를 입더라도 그 위에 넉넉한 셔츠를 겹쳐 입고 깃을 어깨 위로 툭 넘기듯 연출하는 것이죠. 그러면 자연스러운 볼륨감이 살아나면서 한결 여유롭고 당당한 실루엣이 완성됩니다.
반대로 화려한 스타일보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함을 선호하는 이라면 위아래를 깔끔한 수트로 정돈하되 강렬한 색감이나 디자인 구두에 시선을 주는 것으로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삼을 수 있습니다. 혹은 잘 정돈된 머리 위로 위트있게 반짝이는 헤어핀 하나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그니처는 고정된 의상이 아니라 내 몸과 분위기를 가장 아름답게 조율할 줄 아는 안목의 결과물입니다. 입었을 때 가장 나답고 편안해지는 나만의 공식을 갖는 것, 그것이 일상에 미치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거대합니다.
2. 유행의 피로함을 이기는 타임리스(Timeless)의 가치…안목의 기준
트렌드는 매달 바뀌지만, 안목이 깃든 시그니처 아이템은 10년이 지나도 변치 않은 나만의 선과 결을 찾는 일 그것이 바로 내 안목의 시작이자 나를 대접하는 진짜 실용 패션의 첫걸음입니다. 지나치게 유행하는 옷들로 옷장을 채우는 대신 소재가 주는 우아함과 클래식한 재단이 주는 힘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경제적이고 지속 가능한지를 보여줍니다. 젊었을 때는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옷의 디자인을 중요하게 보았지만, 이제는 내 몸의 곡선을 감싸주는 ‘선(Line)'과 ‘소재'에 투자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색을 은은하게 밝혀주는 고급스러운 원단과 내 체형을 우아하게 보완해 주는 단단한 재단(테일러링)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골든 에이지에 접어들며 맞이하는 가장 큰 변화는 삶의 중심추가 외부가 아닌 집으로 이동한다는 점입니다. 외출하는 시간보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이 시기야말로 홈웨어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에서 입는 옷이야말로 내가 나를 대접하는 태도의 진짜 시험대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의 시그니처 아이템은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어 오롯이 나만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가장 사치스럽고도 실용적인 패션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저마다의 취향만큼이나 다채롭고 흥미롭습니다. 누군가는 낮 동안의 단정한 옷을 벗어 던지고 오직 나만을 위해 조금 과감하고 매혹적인 슬립을 걸친 채 우아하게 와인 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또 누군가는 앞치마를 자신만의 확고한 시그니처로 삼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온종일 부드럽게 발을 감싸주는 최고급 실내슬리퍼에 아낌없이 투자하며 보이지 않는 럭셔리를 즐깁니다. 이처럼 늘어난 티셔츠나 아이들의 추리닝 대신 내 안목이 깃든 홈웨어를 선택하는 순간 집은 단순히 머무는 공간을 넘어 내 정체성이 피어나는 가장 편안한 무대가 됩니다.
3. 역할(Role)이 아닌 Identity를 대변하는 도구
그동안 입어왔던 옷들이 누구의 어머니 또는 직급의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시그니처 아이템은 오롯이 내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명함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보다 나의 편안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기본을 지키되 디테일을 아는 사람으로 옷 한 벌로 내 정체성을 세련되게 전달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80세가 넘으신 어떤 분은 항상 풀메이크업을 하시고 밝은 칼라의 셔츠와 잘 다려진 하얀색 바지를 입으십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자신감 넘치시고 여유로운 표정은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인테리어에서도 오랜 고민 끝에 들인 근사한 소파 하나가 거실 전체의 공기를 바꾸듯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귀하게 대접하는 마음으로 고른 옷 한 벌은 거울을 보는 내 눈빛을 바꾸고 걸음걸이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결국, 내 안목을 누린다는 것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수만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나에게 속한 단 하나를 골라낼 줄 아는 용기입니다. 이번 주에는 내 옷장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나를 가장 나답게 증명해 줄 단 하나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무엇일지 나만의 목록을 적어보는 것에서부터 이 지속 가능한 멋의 여정을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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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칼럼‘김지나의 살며 생각하며’를 통해 오랜 시간 독자들과 함께 해온 메릴랜드 거주 작가. 요즘은 삶의 태도가 곧 멋이 되는‘스타일 인문학’에 주목, 중년 이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실용 패션을 강조하는 패션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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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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