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춰 세웠다. 초여름인데 낮 기온은 벌써 90도를 웃돈다. 습도까지 높아 건물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몇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차 안의 쾌적함으로 몸의 열기를 식히며 주위를 돌아본다. 길가의 나무들도 축 늘어진 모습이 너무 더워서 헐떡이고 있는 것만 같다.
도로 옆 자전거길로 한 청년이 전동 스쿠터를 타고 지나간다. 학교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와 묵직한 배낭으로 보아 이곳 대학에 다니는 학생인가 보다. 이 더위에 그는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린 채 바람 속으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잠시만 밖에 서 있어도 온몸에 땀이 배어나는 날씨인데, 그는 마치 들판을 달리는 소년처럼 가볍고 자유로워 보였다. 혹시 아직 자동차를 마련할 여유가 없는 것일지 생각해 보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런 부족함이나 짜증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봄날 싱그러운 바람을 즐기는 모습이다. 세상의 쓴맛을 알기에는 아직 어려 보인다. 그래서 아마도 그 맑고 순수함으로,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두려워하기보다는 오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결혼하자마자 미국에 와서 넉넉하지 않은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던 시대였기에 모든 일을 직접 부딪치며 헤쳐 나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지출을 하기도 하고 잘 몰라서 공연한 벌금을 물기도 했지만 당연히 치러야 할 수업료라 생각했다. 천오백 불짜리 중고차를 타고 다니며 필요한 생활용품은 대부분 거라지세일에서 남이 사용하던 것을 구매해 살았다. 그래도 지금은 가장 없이 지냈던 그 시절이 가장 풍요로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 학기부터 후에 우리의 멘토가 된 한국인 교수님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다. 그해에 강의를 가장 잘하는 교수로 선정된 그분은, 석사 과정을 한국에서 마치고 박사 과정을 미국에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대학 교재도 집필 중이던 그분은 오후 5시 이후에는 언제나 가족에게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학위만큼이나 가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나중에 학위를 따면, 나중에 직업을 얻으면 하면서 미루기 시작하면 그 ‘나중’은 절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바빠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정해 반드시 지키라는 그분의 권면을 우리는 충실히 따랐다. 서로가 너무 다른 인격체라는 것을 크고 작은 다툼을 통해 알아가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은 우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 주었다.
신호가 바뀌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잠시 멈춰 있던 동안에도 성실히 앞으로 달려가던 그 학생이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보고 싶어 고개를 돌린다. 땀으로 젖은 얼굴 위로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다. 앞뒤 사정을 알 수 없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학생일 뿐이지만 그에게 응원을 보낸다. 언젠가 그가 오늘의 땀과 수고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날이 속히 오기를, 지금 그가 품고 있는 꿈이 그의 오늘을 더 풍요롭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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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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