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베이징 특파원 시절 중국의 대표적 관영학자 중 한 명인 후안강 중국 칭화대 국정연구원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핫’한 중국인 학자였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에서는 중국의 ‘기술 굴기(?起)’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후안강은 여기에서 중국의 괄목할 만한 대도약을 강조하며 ‘수퍼 차이나’를 외쳤다. 해외 중국 분석 다큐에서도 그는 미국과 대적하는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한 중국의 위상 변화를 설명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받은 그의 인상은 예리한 경제학자라기보다는 홍보 전문가에 가까웠다. 중국의 미래 전망에 대한 질문에 그는 “5년 안에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의 1.5배 수준으로 도약하고 10년 뒤 미국의 2배에 가깝게 성장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은 구매력 평가와 종합 국력 등을 비춰볼 때 이미 미국을 넘어섰고 수년 내 미국을 제치고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시진핑 지도부 총애를 받던 그가 외쳤던 수퍼 차이나론의 결과는 어떤가. 그가 중국의 세계 1위 초강대국 등극 시기로 거론했던 2020년은 미국과 중국이 1단계 무역 합의에 최종 서명한 해였다. 그해 1월 류허 중국 부총리는 미국 백악관을 방문해 중국이 향후 2년간 2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제품을 구매하기로 약속하는 문서에 사인했다.
미국이 대중국 추가 관세를 철회하는 대신 중국은 미국산 제품 구매를 대폭 늘리는 합의문에 서명한 것이다. 14억 내수시장과 중앙아시아·아프리카 등으로 발을 넓힌 일대일로를 발판으로 미국의 전방위 공세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중국의 자신감은 오만으로 드러났다. 수퍼 차이나의 주창자였던 후안강 교수는 이론적 근거가 빈약한 초강대국 중국론으로 미중 무역 갈등을 불러온 주범 중 하나로 지목돼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팽팽한 기싸움 끝에 성사된 미중 1단계 무역 합의는 양국 간 서명 직후 확산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흐지부지됐다. 중국의 미국산 콩 수입량은 코로나19 이후 급감했고 미국산 원유 수입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미국에는 성과가 있었다. 중국의 반도체 제조국 등극 야심과 그 초기 질주를 멈춰 세운 점이다.
후안강의 수퍼 차이나론이 떠오른 건 도널드 트럼프 집권 2기와 함께 재개된 미국의 대중국 관세 압박도 있지만 요즘 우리 증시를 뜨겁게 달구는 반도체 수퍼 사이클 열기 영향이 컸다. 냉정히 말하면 네덜란드 ASML의 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 제재 등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작한 대중국 반도체 기술 통제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과 대만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중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도의 반도체 질주를 보면서 트럼프의 대중국 첨단기술 제재만 없었다면 지금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대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협적인 존재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할지 모른다.
미국의 압박으로 반도체 굴기 달성에 실패한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와의 후반전에서 인공지능(AI)으로 역전승을 거두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다. 그 꿈은 후안강 교수가 외쳤던 수퍼 차이나론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다. 정치 구호에 가까웠던 수퍼 차이나와는 달리 ‘딥시크’ 등 중국의 저비용·고효율 AI 모델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도약하고 있다. AI뿐 아니라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은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보기술 업체 화웨이는 EUV 노광장비 없이 수년 내 1.4㎚(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 미세공정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주목할 점은 이런 중국의 야심을 보는 글로벌 시장의 시선 변화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수년 내 중국이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무서운 경쟁 상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메모리 수퍼 사이클 덕택에 코스피 증시는 올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인 주식시장이 됐다. 하지만 국내외 반도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반도체 호황에 취해 한국이 포스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대 대비를 게을리하면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중국의 반도체·AI 굴기는 이젠 눈앞에 닥친 위협 신호다. 반도체 착시에 빠져 지금의 메모리 수퍼 사이클의 영화가 영원하리라 생각하면 그건 오만이다. AI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고 반도체 분야에서 HBM을 넘어서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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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문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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