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간다. 초겨울의 하늘은 이내 가뭇해진다. 차가 어스름한 동네 어귀에 접어들면 집들은 하나둘 불을 밝힌다. 낮에는 그저 벽과 지붕이던 집이 저녁이 되면 기다림이 된다. 나도 그 불빛 가운데 하나를 향한다. 누군가의 기다림이 된다는 사실 하나로 코끝이 찡해진다.
내 기억의 첫 번째 집은 후암동 꼭대기에 있었다. “영애야, 어서 일어나! 유치원 가야지.” 낮잠을 깨워 언덕 아래로 내달리게 해 놓고, 위에서 깔깔거리던 삼촌이 함께 살던 집. 새벽마다 옆집 찰떡 메치는 쿵덕쿵덕 소리는 어린 나의 잠을 흔들었고, 지금도 오래된 북소리처럼 하나의 박자로 남아있다.
후암동 언덕이 너무 힘겨웠을까. 원효로 4가 집은 지대가 낮았다. 가끔 한강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물이 차오르면 동생과 함께 서너 집 위의 미죽의원으로 피난을 갔다. 우리에겐 그저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키가 작고 친절했던 원장의 외아들 영천이도 의사가 되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이 각자의 길을 간다는 사실도 하나의 풍경처럼 남아있다.
조금 살림에 여유가 생겼을까. 아버지는 돌 정원과 대추나무와 넓은 잔디를 갖춘 집을 장위동에 지었다. 주방을 꿈꾸던 엄마의 드림하우스이기도 했다. 당시 연애 중이던 지금의 남편도 엄마에게 잘 보이려 당시에 귀한 바나나를 들고 뒤축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집. 그 집에서 나는 약혼식을 했고, 엄마는 정성스럽게 상을 차렸다. 결혼 후 그 집은 내 친정이 되었다.
결혼 후 곧 미국으로 올 계획이었으므로 시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집은 결코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조곤조곤 배려 깊은 친정엄마와는 전혀 다른 시어머니에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부지였던 나에게는 정서적 격변기였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버스가 하월곡 시집이 가까워지면 내 가슴이 놀란 닭처럼 뛰었다. “몇 정거장만 더 가면 장위동인데…. 그냥 가 버릴까?” 매번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실행하지 못했다.
반년쯤 지나 분가했다. 정릉에 방 한 칸을 얻어 장롱과 경대를 넣으니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자리만 남았다. 남편을 위해 시장을 보고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이던 소박한 애착과 사랑의 추억이 있는 집. 한편 자주 늦는 남편 길들인다고 일부러 늦게 들어가 봐도 늘 불 꺼진 방이었다. 그래도 눈치 보지 않고 다투고 화해할 수 있었던 곳. 좁았지만 가장 넓었던 집이었다.
미국에 온 뒤 우리는 주를 옮겨 다니며 울새처럼 수많은 둥지를 만들었다. 엄마라는 매뉴얼을 가르쳐 줄 어른도, 스마트폰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자라며 집을 만들어 갔다. 맹모삼천의 DNA가 있었는지 학군을 따라 세 번이나 이사하기도 했다. 세 아이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13년을 함께 보낸 집은 버지니아 맥클린 집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피부색이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했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여자 친구와 새벽까지 속닥거리고, 매일 30분씩 샤워하고 멋을 냈다. 새끼 울새가 혼자 날 수 있도록 훈련해 날려 보냈듯, 그들도 이 집에서 운전면허증을 받아 한 명씩 대학 기숙사로 날아갔다.
타주 대학으로 집을 떠난 아이들은 우리 집에서 어떤 이야기를 담아갔을까.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죽을 지경으로 지쳐 있을 때 신문지로 덮인 침대가 있는 자신의 판잣집을 그리워했다. 나의 아이들도 대학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힘들었겠지.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 속에서 익숙한 침대가 그리웠을까. 가져온 더러운 빨래를 뽀송하게 만들어 돌려보내던 내 집이 그들에게 따뜻한 온기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뿌리내린 후 간다는 고국 방문이 13년이나 걸렸다. 당시 한국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친정은 강남 서초동으로 옮겨 있었고, 익숙한 골목이 사라진 생소한 도시가 영 정 붙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해마다 서울을 찾은 것은 늙은 부모를 보내기 위한 나름의 준비였다.
아버지가 먼저 간 후 엄마는 뿌연 안개가 덮인 망각의 숲에 한 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작년 봄, 미국에서 딸이 왔다며 나를 꼭 부둥켜안고 울던 엄마는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동생에게 물었다. “제는 누구냐?” “엄마 맏딸이잖아!” 아이처럼 큰소리의 응석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엄마는 지금, 새 처소에서 당신의 엄마와 할머니를 만나 행복할까. 가는 길은 누가 안내했을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을까?
돌아보니 나는 참 많은 집을 떠나오며 살았다. 후암동 언덕집, 원효로 물난리 집, 친정이 된 장위동 집, 정릉 셋방, 아이들을 키운 집들. 그 집들을 모두 지나왔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떠나보내지 못했다. 이제야 안다. 사람은 집을 떠나며 산 것이 아니라 집은 내 삶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고 나를 품어주었다는 사실을.
우리 인생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집에서 태어나, 수많은 집을 지으며 늙어가고, 마지막엔 티끌이 되어 우주라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채의 집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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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애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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