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여행 - 경기 양평시 메덩골정원 ‘현대정원’ 개장
정원을 찾는 사람은 꽃을 바란다. 계절에 맞춰 예쁜 색을 입고 갖은 향을 풍기는 꽃. 그러나 이 정원은 다르다. 꽃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결코 정원의 주인공이라 할 수 없다. 전체 면적에 비하면 들판에 몇 송이 피었다고 할 수준이다. 대신 돌과 철, 기와와 벽돌이 흔하다. 정원을 소개하는 관계자부터 “정원은 수목원이 아니다”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대신 공간의 주제와 조형을 탐닉하는 정원이다.
지난해 9월 ‘한국정원’을 선보인 경기 양평시 메덩골정원이 이달 2일 ‘현대정원’을 개장했다. 2만3,100㎡ 규모의 한국정원 대비 2배 이상 넓은 4만9,500㎡ 규모다. 본격적으로 정원을 기획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14년 만에 비로소 완전 개장했다.
한국정원이 우리 전통 정원의 요소를 살리고 재해석하는 데에 방점을 뒀다면, 현대정원은 메덩골정원이 정체성으로 삼는 ‘인문학 정원’을 현실화하는 데에 방점을 뒀다. 현대정원의 우측은 한국의 역사를 담은 ‘대한민국 이야기’, 좌측은 철학·문학을 공간화한 ‘생각의 섬’으로 구성됐다. 문사철(문학·사학·철학)이 전부 담긴 셈이다.
기하학적 공간에 인문학이 담기다
대한민국 이야기 ‘불굴의 정신’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거북선을 형상화했다. ‘거북선’ 내부 겹겹이 쌓인 쐐기 조형이 기하학적이다.
유럽의 정원이라 하면 자로 잰 듯이 반듯한 직선과 컴퍼스로 그린 듯한 완벽한 곡선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기하학적 조형의 정수다. 학창 시절 ‘동양은 자연과 융화되려 하고 서양은 자연을 통제하려 한다’고 여러 번 듣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서양(유럽)식 정원의 본질은 자연을 통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인간의 이성과 이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조경수와 꽃이 쓰였을 뿐, 본질은 인간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철학과 뿌리를 공유하는 수학이 공간에 투영된 것이 결국 기하학. 이렇게 생각하면 정원은 태생적으로 인문학적일지 모른다.
메덩골정원은 다시 한번 인문학 정원을 표방한다. 그 때문인지 메덩골 현대정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기하학적 구성이다. 동심원, 내접원, 외접원, 정사각형, 와선, 호, 점, 선… 마치 초월자의 스케치북을 훔쳐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인접한 한국정원과의 대비가 극명하게 도드라진다.
현대정원의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선비의 나라’부터 기하학적 몰입이 시작된다. 각 3개의 내접원으로 구성된 외접원 2개가 ‘8’ 자 모양을 한 정원이다. 더 큰 원의 정중앙에 검은 원판이 가느다란 기둥에 떠받혀 있는데, 무엇인지 알기 어렵지 않다. 우리 전통의 갓이다. 갓을 향해 걷다 보면 발밑의 길이 다소 특이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일반적인 보도블록이나 타일이 아니다. 끊임없는 물결무늬가 묘하게 낯익은 것이, 자세히 보니 기왓장이다. 길옆 배수로도 기왓장으로 놓여있다.
선비의 나라 다음 정원도 원형이다. 화단이 물결 모양으로 쌓여 있다. 이 화단의 물결을 가르는 굳건한 쐐기, ‘불굴의 정신’은 거친 난세를 헤쳐나가는 거북선을 형상화했다. 뒷면으로 돌아가면 ‘거북선’ 내부에 입장할 수 있다. 쐐기 모양으로 층층이 쌓은 층계는 문화공연 관람석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계단식 논을 연상시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지나면 ‘고난의 시대’에 다다른다. 개성적인 메덩골정원에서도 가장 독특한 정원이다. 초입부터 아름다운 정원의 입구보다는 지하 방공호를 연상시킨다. 철근콘크리트 벽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 낮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 때문에 허리를 펴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 소나무, 죽어가고 있다.
고사목은 전사자를 상징한다. 흐르다 굳은 송진은 혈흔 같고, 사후에도 서로의 가지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는 모습은 희생으로 얽힌 전우애 같다. 벽도 군데군데 무너져 철근이 흉하게 노출돼 있다. 고사목이 뒤덮은 참호 사이까지 도달하는 햇빛은 얼마 없다. 음산한 분위기 덕에 이곳은 양치식물과 거미의 터전이다.
정원에서 가장 이질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추천하지만 신체가 불편한 관람객은 거동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를 우회할 수 있는 ‘피란길’이 따로 조성돼 있다.
철학자, 성인, 문인의 공간’
‘한강의 기적’, ‘극복의 시대’, ‘번영의 시대’를 차례로 지나면 정원의 시그니처 건축물 ‘위버하우스’가 보인다. 대한민국 이야기와 생각의 섬을 잇는 꼭짓점에 해당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이상적 인간상 ‘초인’을 형상화했다. 메덩골정원의 건축 설계를 주도한 페소 본 에릭사우센 건축사무소가 설계했다. 정식 개장 전부터 건축 애호가들에게 집중 관심을 받아 우선 한국정원 방문객을 대상으로 ‘서비스’ 관람을 진행해왔다. 현대정원이 정식 개장한 현재는 현대정원 관람권, 혹은 통합 관람권으로 이용할 수 있다.
생각의 섬은 시야를 활용한 공간이 특징이다. ‘미로’가 대표적이다. 니체가 주장한 ‘자기 자신과 세계의 심연을 탐험하며 길을 찾는 고독한 여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로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외부 공간과 시각적으로 단절된다. 분명 이 조적벽 밖에는 온갖 정원이 있었건만, 미로 안에서 보이는 것은 메덩골고개의 울창한 산림과 붉은 벽, 그리고 홀로 우뚝 솟은 소나무 한 그루뿐이다. 멀고도 가까운 듯한 소나무를 향한 ‘길’을 찾는 것이 이 고독한 여정이다.
부처의 ‘깨달음’ 역시 관람객의 시야를 재미있게 비튼다. 정원 중앙 ‘대웅전’ 한가운데에 서면 내가 사라진다. 사방이 거울로 된 공간인데 어찌 된 일인지 자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주위 사람과 풍경만 보인다. 거울과 거울이 마주 보며 수많은 세계를 만들어 내고 하늘도 금이 간 듯 신묘하게 보인다. 스스로의 윤곽을 지우고서야 무한한 세상 속 모든 존재가 결국 하나였다는 깨달음이 보인다.
‘여정’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이데아’는 플라톤의 철학을, ‘자유’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주제로 한 공간이다. 이 모든 공간은 ‘영원’의 길로 연결돼 있다.
기사 초입에 ‘완전 개장’이라고 적었지만 아직 건설 중인 건물이 한 동 있다. 방문자센터로 사용될 ‘디오니소스’다. 기하학적 정밀함이 충만한 현대정원과 달리 극단적으로 비정형적이다. 거침없이 물결치는 모습이 술과 광기의 신의 이름을 딴 공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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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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