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목수 일을 하는 한 양반은 온통 일 생각뿐이라 일요일도 월요일인 줄 알고 자주 출근을 한다. 그것도 직원들이 마실 커피까지 양손 가득 사들고 갔다가, 텅 빈 사무실을 보고서야 ‘아, 오늘이 일요일이구나’ 하고 허탈하게 웃곤 한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또 다른 양반은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는 누구보다 일찍 문을 연다. 이유를 물으니 “매니저도 쉬어야 하지 않겠냐"며 웃는다. 참 부지런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충실한 이웃들이다.
주말도 반납한 이들의 고된 노동을 보며 우리는 ‘부당하다’거나 ‘불공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사장이 특정 직원에게만 강제로 이런 주말 근무를 지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크게 분노를 느끼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상황이 단순히 어렵거나 불편한 것 때문이 아니다. “왜 나만? 왜 저 사람은 다르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즉 ‘불공정과 차별’과 ‘무시’를 느낄 때 인간의 분노는 폭발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분노를 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지혜가 바로 ‘규칙(Rule)’과 ‘법(Law)’이다. 규칙이 정교해지면서 거친 정글 같았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었고 스포츠가 발전했다. 우리는 이 규칙과 법이 상식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를 ‘선진국’이자 ‘문명국’이라 부른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정치 무대를 보면 이 상식적인 규칙의 근간이 흔들리는 불안한 징후가 보인다. 공화당 주도로 하원에서 통과시킨 이른바 ‘미국 구하기 법안(SAVE America Act)’이 대표적이다. 명분은 ‘선거 공정성 강화’다.
불법 이민자의 투표를 막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공정성이라는 탈을 쓴 또 다른 ‘규제와 차별’에 가깝다.
미국에는 한국 같은 주민등록증이 없다. 대다수 미국인은 각 주 정부가 발급한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쓴다.
그런데 이 법안은 유권자 등록을 할 때 운전면허증을 인정하지 않고, 연방 정부가 발급한 시민권 증명서, 여권, 혹은 ‘출생증명서’ 원본을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투표장에서도 사진이 부착된 이 서류들을 지참해야 한다.
현재 미국인 중 유효한 여권을 가진 사람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초당적 정책센터 등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중 출생증명서가 아예 없거나 분실하여 당장 제출하지 못하는 유권자가 무려 2,100만에서 2,800만 명에 달한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여성의 84%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는데 성이 바뀐 여성들은 출생증명서의 이름과 현재 신분증의 이름이 일치하지 않아 이 법안대로라면 투표권을 행사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결국 고향을 떠나 있는 대학생과 청년들, 이사가 잦은 저소득층, 그리고 수많은 여성의 참정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상원의 현재 의석 구조상 이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문제는 법안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특정 세력은 이를 올해 11월 선거에서, 법안을 반대한 민주당이 불법 이민자 투표를 용인하느라 선거 공정성을 짓밟았다는 프레임으로, 보수 표심을 결집하려 들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동은 선거 관리 기관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되고, 근소한 표차로 당락이 결정될 경우 불복 사태로까지 번질 수 있는 위험한 불씨를 지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이 합의하지 않은 규칙을 들이밀고, 법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처음에는 몇몇의 저항으로 시작되지만, 공론화 과정마저 왜곡하려 들때 민심은 무섭게 돌아선다. 민심이 진정으로 분노하면, 조용히 흐르던 강물이 삽시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홍수로 변하듯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공정성 시비라는 이름의 실력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미주 한인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규칙을 강화한다는 명목 뒤에 숨은 의도가 진정한 공정인지, 아니면 또 다른 차별과 배제인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선거의 규칙과 법제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 한인 유권자들의 현명한 판단과 당당한 참여가 더욱더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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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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