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이 물음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민족은 행복한 민족이다. 한 땅에서 나고 자라 그 땅에 묻히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란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공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 이 질문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다. 중국에서는 “너는 한국 사람이냐”는 물음을 받고, 한국에서는 “너는 중국 사람이냐”는 물음을 받는다. 미국에 오면 두 질문이 한꺼번에 날아온다.
조선족의 이민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십구세기 후반, 함경도와 평안도의 굶주린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황무지를 논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이 오늘의 조선족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자 연변의 젊은이들은 대련으로, 청도로, 상해로, 북경으로 떠났고, 1992년 한중수교가 열리자 조상들이 떠나온 땅으로 백 년 만에 되돌아가는 역이민이 시작되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안전한 일본으로, 역동적인 미국으로, 유럽과 호주로, 생활비 낮은 동남아로 그러다 다시 익숙한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이들도 있다. 조선족의 지도에는 종착역이 없다.
정체성도 한 겹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중국의 소수민족이요, 혈통으로는 분명한 한민족이며, 이제는 미국이라는 용광로 속의 일원이기도 하다. 미국의 조선족만 보아도 미국 시민권자, 중국 국적의 영주권자와 비자 신분자, 그리고 의외로 적지 않은 한국 국적 소유자 결혼이나 부모의 호적으로 귀화한 뒤 다시 태평양을 건너온 대한민국 재외국민으로 나뉜다. 한 가족 안에 세 나라 여권이 나란히 놓여 있는 풍경, 이것이 미국 조선족의 현실이다.
같은 조선족이라도 어느 땅에 사느냐에 따라 얼굴이 달라진다. 중국의 젊은 조선족은 탄탄한 인맥과 뛰어난 경제적 후각으로 한중을 잇는 다리가 되었고, 일본의 조선족은 유학파가 많아 주류사회 침투율이 높다. 가장 방대한 그룹인 한국의 조선족은 근면하기로 따를 자가 없고, 이민 역사가 가장 짧은 미국의 조선족은 작은 비즈니스를 발판 삼아 놀라운 속도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떠도는 민족이라 하여 흔히 유대인에 비유하지만, 닮은 것은 겉모습뿐이다. 유대인은 핍박에 등 떠밀려 쫓겨 다녔고, 조선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스스로 길을 나섰다. 쫓겨난 자의 이동과 찾아 나선 자의 이동은 겉은 같아도 속이 다르다. 하나는 비극의 역사요, 하나는 도전의 역사다.
또한 조선족에게는 유대교도 탈무드도 없다. 있다면 오직 몸으로 익힌 생존의 문법뿐이다. 이것이 강점이자 아픈 곳이다. 경전이 없는 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두만강을 건넌 첫 세대부터 오늘 뉴욕에서 새 삶을 일구는 세대까지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일이야말로, 조선족이 스스로에게 물려줄 유일한 탈무드일 것이다.
물론 그늘도 있다. 각자도생에는 능하나 하나로 뭉치는 데는 서투르고, 기록의 문화가 얕아 앞 세대의 경험이 뒷세대에 전해지지 못하며, 조선어를 잃어가는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안타까움도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 이 양자택일 앞에서 조선족은 영원히 정답을 낼 수 없다. 애초에 잘못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어느 쪽”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며, 그 사이야말로 조선족의 고향이다.
흔히 조선족을 뿌리 없이 떠도는 민족이라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조선족은 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민족이다. 어느 땅에 내려앉든 김치를 담그고 명절상을 차리고 아이에게 우리말 자장가를 불러준다. 정체성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로 답하는 것. 조선족의 답은 이미 백오십 년의 삶으로 쓰여 있다. 견디며, 맞추며, 도전하며 살아간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조선족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아직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붓은, 내 손에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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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조선족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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