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은 미 독립 250주년이 되는 날이었지만 250년전 미국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독립선언서는 만들어졌으나 13개주 곳곳에서 영국군과 독립군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고 미국은 독립을 선언한지 한 달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 했다.
그 해 8월 27일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독립군이 윌리엄 하우가 지휘하던 영국군에게 거의 궤멸될뻔 했기 때문이다. 1만여 독립군은 3만여 영국군에 포위돼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 때 하우가 바로 진격 명령만 내렸더라면 독립 전쟁은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우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짙은 안개가 깔렸고 이를 틈타 독립군은 동강(East River)을 건너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후 워싱턴은1781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고 독립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암울했다. 1787년 대니엘 셰이스가 주도한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남발한 국채는 휴지나 다름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현행 연방 헌법이다. 1787년 제정된 이 헌법은 1788년 각주에 의해 승인되고 발효돼 1789년 처음 지금의 연방 정부가 탄생했다. 조세권을 가진 정부가 각주의 채권을 인수해 경제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미국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행정부에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준다는 ‘반연방파’의 반대로 각주의 인준 여부가 불투명했다. 이에 맞서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 등 연방파들은 이 헌법의 필요성을 역설한 글들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미 헌법에 관한 가장 뛰어난 해설서’로 불리는 ‘연방 백서’(Federalist Papers)다.
이 백서는 사법부의 권한과 성격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법 심사’(judicial review)라는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법 적용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특정법이 연방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당연히 사법부의 임무다.
따라서 의회가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사인한 법도 대법원이 헌법 불일치를 이유로 무효로 선언하면 휴지가 되는 것이다. 해밀턴 말대로 행정부처럼 ‘칼’도, 의회처럼 ‘지갑’도 없는 사법부가 모든 사안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갖게 된 것이다.
연방 헌법은 또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실상 종신제로 하고 재임중 월급도 깎지 못하게 하며 연방법으로 보안관을 통해 신변 안전을 보장토록 하고 있다. 그덕으로 미국의 판사들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에 따른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현 연방 대법원은 보수 6, 진보 3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반드시 현 행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판결만 내린 것은 아니다. 지난 주 6대 3으로 내린 도널드의 출생 시민권에 관한 명령 위헌 판결이 그 예의 하나다.
지난 100여년간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미국 사람이란 주장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 사법 관할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미국인’이란 수정 헌법 14조의 규정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또 특별한 독립 기관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 임원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해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선거일이 지나 도착하는 우편 투표의 유효성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올 초 도널드가 부과한 상호 관세가 연방법이 부여한 권한을 넘어 무효라고 판시한 바 있다. 도널드는 관세에 관한 언급이 없음에도 ‘국제 비상 경제권한법’을 악용해 자기 마음대로 관세를 붙이고 내리는 등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는데 관세는 의회의 고유 권한이라며 대법원은 그의 행정 명령을 무효화했다.
물론 대법원이 항상 반기를 든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FRB 이사 해임은 금지했지만 다른 기관에 대해서는 인정했고 정치 후원금에 대한 제한도 철폐했으며 정치적인 이유로 선거구를 마음대로 재조정하는 것도 허용했다. 대법원은 또 난민 신청 중인 아이티와 시리아 이민자의 추방 유예 요청을 기각하고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성이 여성 스포츠에 참가하는 것과 마리화나를 자주 사용하면서 총기를 소지한 사람을 기소하는 것은 금지했다.
무엇보다 대법원은 대통령이 직무중 행한 일에 대한 면책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함으로써 ‘직무’ 자만 갖다 붙이면 어떤 일을 해도 퇴임 후 처벌받지 않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널드가 자신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바보와 애완견” “가족에 대한 수치”라고 부르며 분노한 것을 보면 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만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현 대법원은 뚜렷한 보수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본분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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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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