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인류는 제1차 대전의 참화를 경험했고 그후 이보다 더 나쁜 제2차 대전, 그리고 이어진 냉전 속에 한국 전쟁, 월남 전쟁 등 국지전이 일어났다.
언제나 계속될 것 같았던 전쟁의 포연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군부터였다. 그 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누적된 내부 모순이 폭발하면서 소련은 1991년 역사의 휴지통으로 사라졌다.
이와 함께 냉전도 끝나고 세계 곳곳에서 평화와 화해의 무드가 퍼져나갔다. 1994년에는 불구대천의 원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하고 분쟁 종식을 약속한 오슬로 협정을 맺었고 그 공으로 이츠학 라빈, 야세르 아라파트와 시몬 페레스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계 경제는 무역 자유를 토대로 전례없는 성장을 계속했고 미국의 고질병이던 재정 적자는2000년 수십년만에 처음 균형을 이뤘다. 인터넷을 비롯한 하이텍은 세계를 하나로 묶고 전 인류에게 번영을 약속하는듯 보였다.
1992년 나온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은 이 시대 낙관론의 상징 같은 책이다. 여기서 후쿠야마는 공산주의 파시즘 등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와의 정치 체제간 경쟁은 민주주의가, 중상주의 국가 통제주의와 자유 무역을 바탕으로 한 시장 경제주의와의 싸움은 시장 경제가 승리했으며 역사적 체제 경쟁도 종언을 고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낙관론이 깨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는 21세기 초는 20세기말과 다른 시대가 될 것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억만장자가 자신의 극단주의 화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아프간의 황무지로 숨어들어가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 자체가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이를 응징하기 위한 아프간 전과 대량 살상 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건 이라크 전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랐다. 아프간 전은 장장 20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의 복귀와 미국의 일방적 철군으로 끝났고 이라크 전도 애초에 대량 살상 무기는 없었던 것만 확인하고 막대한 인명과 물자만 낭비한 후 마무리 됐다.
월남전부터 소련의 아프간 철군, 미군의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 등 강대국의 약소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한결 같이 보여주는 것은 무기가 많고 성능이 우수하다고 반드시 전쟁에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의지다. 결사항전을 외치는 집단이 스팅어 미사일, 사제 폭탄(IED) 등 신무기를 사용해 장기전을 펼치면 강대국도 당해내기 어렵다.
이런 교훈을 무시하고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지난 4년간 러시아 사상자는 140만, 사망자만 5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며 지금은 매달 사상자수가 충원 인력을 넘어서고 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도 러시아군은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인구가 러시아의 ¼에 불과한 우크라이나가 이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드론이란 신무기 때문이다. 매년 수백만대의 드론이 러시아군은 물론 이제는 모스크바와 시베리아에 있는 정유 시설까지 공격해 러시아는 지금 극심한 기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한때 푸틴의 최고 전리품이던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 드론의 손쉬운 표적이 됐으며 흑해를 오가던 러시아 수송 선박도 이것 때문에 사실상 발이 묶인 상태다.
작년 젤렌스키를 백악관으로 불러 “당신은 카드가 없다”며 망신줘 쫓아냈던 도널드는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이번 나토 회담에서는 그를 극찬하며 패트리어트 미사일 생산 허용 등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지난 수십년간 전쟁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외국과의 끝없는 전쟁을 없애겠다”며 당선된 도널드는 손쉬운 승리를 낙관하며 지난 2월 이란을 쳤으나 결과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기대했던 체제 전복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전쟁 전 자유롭던 호르무즈 해협 항해만 어렵게 됐다. 이란이 드론 몇발만 발사해 위협해도 선박들은 여기를 지나기 어렵다. 미국은 이란 군사 시설을 폭격하고는 있으나 지상군 파견 없이 이를 전면 통제하기는 힘들며 중간 선거를 코 앞에 둔 미국이 희생을 감수하고 이런 결단을 내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후쿠야마는 역사는 테제와 안티테제, 진테제(정반합)의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는 헤겔의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역사의 종언’을 썼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의 승리가 결정된 듯 보인 순간부터 세계 금융 위기, 부의 극심한 편중, 이에 따른 시장 경제 비판과 자국 우선주의, 반이민 인종주의, 권위주의, 강대국의 약소국 침공 등 그 후 최근까지 역사는 헤겔이 오히려 옳았음을 보여주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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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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