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은 보수주의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토머스 페인의 한 생각을 즐겨 인용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 레이건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암살 사건과 도시 폭동, 베트남전쟁, 워터게이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은 미국인들에게 낙관주의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페인의 망상적인 인식은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에 열광하는 현상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아직 정의를 찾지 못한 채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카멀라 해리스의 러닝메이트였던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사회주의를 “이웃 간의 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옆집으로 이사 온 가족에게 캐서롤 요리를 가져다주는 것 같은 것인가? 1871년 이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찬가로 불려온 ‘인터내셔널가’는 “굶주림의 포로들이여, 일어나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언제나 모두에게 캐서롤을 나눠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동시에 더 적은 것을 의미한다.
조란 맘다니의 당선은 20세기에 기세가 꺾였던 19세기의 이념인 사회주의에 대한 21세기의 관심에 불을 붙이는 데 일조했다. 뉴욕시장인 맘다니는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을 우선시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동계급이란 무엇인가? 그는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청구서를 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 노동계급의 일원이라는 한 가지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청구서를 내야 하는 모든 사람, 사실상 모든 사람이 사회주의의 우선 대상이라면, 사회주의가 아닌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일종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민주사회주의자(DSA)는 최근 자신들의 ‘강령’을 발표했다. 이 강령은 독자들에게 “자본주의가 없는 미래”를 상상해보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그 노동이 좋은 곳에 쓰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단지 청구서를 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청구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제 사실상 청구서라는 것 자체가 없다. 빚도 없다. 건강보험도 필요 없다. 모기지를 갚을 필요도 없고 집주인도 없다. 편안한 주거는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은퇴 생활은 공공기금으로 보장된다. 식품, 교육, 에너지, 의료, 교통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다. 그것들은 공동의 재화이자 공공서비스다… 비용을 걱정하거나 다시 일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자유가 있다면 어떨까? 매달 말이 되면 집세나 대출금을 어떻게 갚을지, 대학 학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식료품을 살 돈이 충분한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까?”
1845~1846년,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던 한 철학자도 비슷한 나팔을 불었다. 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강요한’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주의는 노동 분업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노동 분업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이라고 불렀으며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인간은 “사냥꾼이거나 어부이거나 목동이거나 비평가이며, 생계수단을 잃고 싶지 않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속박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고 했다.
70년 전, 젊은 마르크스가 ‘소외’의 종식을 놓고 펼친 몽환적인 사색이 재발견되자 좌파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노동가치론을 다룬 마르크스의 장황하고 난해한 ‘성숙기’ 저작들, 예컨대 ‘자본론’을 힘겹게 읽지 않고도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면서 금기를 깨는 듯한 짜릿함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날 DSA의 강령은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로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DSA식 사회주의는 피터팬 정치다. 현실이 가하는 억압으로 이해되는 성인기를 뿌리부터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일, 청구서, 식료품, 주택담보대출과 같은 일상생활의 일상성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좌절한 젊은이들을 위한 심리치료다. 으, 싫어.
DSA가 겉으로나마 정치에 관해 이야기할 때조차 그 극단주의는 단지 유아성의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DSA는 “연방 상원을 폐지”하자고 제안한다. 크고 작은 주들이 연방 상원에서 동등한 대표권을 갖기 때문에 비민주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연방 상원을 폐지하려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13개의 작은 주만 반대해도 개헌을 저지할 수 있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주가 반대할 것이다. 대통령제와 연방대법원을 해체하는 내용까지 포함한 DSA의 이른바 정치 강령은 진지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회와 인간 본성이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다는 페인의 망상을 공유하기 때문에 언제나 실망으로 끝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사회주의가 아예 실망에서부터 시작한다. 성장하는 것과 사회정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래밭 혁명가들’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시카고에서 열린 DSA 전당대회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화제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그럴 만도 하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평균적인 인간의 유형이 아리스토텔레스나 괴테, 마르크스의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개리슨 케일러가 상상해낸 ‘레이크 워비곤’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평균 이상”이다.
시카고 집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극좌파 상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그중에는 ‘단두대 귀걸이’도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사회주의다. 짓궂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미국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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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F. 윌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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