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상은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시간, 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지는 시월의 아침이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 필요가 없고, 무엇인가를 위해 바쁘게 움직일 일도 없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여백이 좋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야말로 삶이 내게 건네는 작은 선물인지도 모른다.
친구가 원두를 직접 갈아 마셔보라며 커피 그라인더와 원두를 가져왔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바리스타가 된 듯 원두를 정성껏 갈아 커피를 내렸다.
사실 프란츠 리스트의 ’ 사랑의 꿈’을 듣고 있자니 커피 한 잔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저 커피 향이 좋아 마시던 내가 오늘은 그 한 잔을 제대로 음미해보고 싶었다.
뜨거운 물을 부으니 갈색 거품이 천천히 올라온다. 원두에서 깊은 향이 꽃처럼 피어났다. 한 모금 머금자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퍼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끝을 감싼다.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로운 아침일 뿐인데 하루가 벌써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던 빌리 조엘이 커피에는 위안이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정말 커피 한 잔이 마음의 풍요로운 위안이 되었다.
리스트의 음악은 커피 향에 스며들어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 조용히 아침을 깨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가만히 자리 잡아 깊은 곳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잔잔해진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향이 있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말투에서, 눈빛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본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말과 행동에 지나친 것을 덧붙이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담담하게 간직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는 은은한 커피 향 같은 인품이 난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진실을 꾸미지 않으며, 자기 식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 피아노 연주를 보러 가자고 먼저 손 내미는 사람, 돌아보니 그런 사람들이 오래도록 내 곁에 남아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아침의 명상이 꽤나 행복해진다.
오늘 하루의 시작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날 저녁, 나는 카네기홀에서 서혜경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아침에 들었던 리스트의 ‘사랑의 꿈’. 그날의 피아노곡의 테마는 연모(in love)인데 정말 연모와 사랑을 품고 있었다. 가슴앓이하듯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쉽게 가라앉지 않는 열정, 그리고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흘렀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쉴 새 없이 건반 위를 오갔다.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아주 여리게 울리는 선율이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아침의 커피 향과 저녁의 피아노 선율이 한 편의 영화 속 음악처럼 하루를 이어주었다.
그 감성을 가슴에 품고 따뜻한 사람들과 감동과 사랑을 나누었던 풍요로운 시간이었다.
삶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크고 화려한 사건이 아니라, 한 잔의 커피처럼 조용히 스며든 사람의 향기와 한 곡의 음악처럼 마음에 남은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 풍요로운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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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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