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기업 연루 분쟁 18건
▶ K칩 이익 노리고 침탈 주장
▶ 합의금 노린 ‘묻지마 소송’도
▶ 최악땐 수입배제 명령 우려
올해 미국에서 한국 기업이 연루된 반도체 특허 소송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반도체가 각국의 핵심 산업 자산으로 떠오르고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면서 특허 침해를 둘러싼 분쟁도 늘고 있다.
6일 서울경제신문이 입수한 한국지식재산보호원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7월 말까지 미국에서 한국 기업이 연루된 반도체 분야 특허 소송은 18건이다. 7개월 치 집계만으로 보호원이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12년 이후 연간 최다 기록을 넘어섰다. 연간 기준으로는 2024년 10건, 지난해 8건이었다. 한국 기업이 얽힌 미국 특허 소송 가운데 반도체 분야만 따로 집계한 수치가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벌어진 특허 분쟁 중 한국 기업이 소송을 당한 사건은 총 9건이다. 이 역시 역대 최다 기록이다. 2024년과 지난해에는 각각 6건의 피소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기업이 올 들어 미국에서 제기한 소송도 9건으로 연간 최다였던 2022년(9건)과 이미 같아졌다. 남은 기간을 감안하면 올해 제소와 피소 모두 두 자릿수를 넘어서고 전체 소송은 20건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호황 노려 급증
반도체 특허 분쟁이 급증한 것은 업황 호조와 맞물려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가 유례없는 수출 실적을 올리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막대한 영업이익을 거두자 이들을 상대로 특허 침해를 주장하며 합의금을 받아내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동시에 한국계 특허관리전문회사(NPE)들의 반도체 특허 권리 행사도 활발해졌다. 과거 특허 분쟁은 해외 NPE가 국내 기업에 소송을 거는 게 주된 양상이었지만 최근에는 국내 NPE도 외국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5월 미국에서 특허 침해 소송을 당했다. 소송을 낸 업체는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만들면서 자사의 3차원(3D) 수직 적층 구조, 트랜지스터 배치 등 특허 기술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업체가 반도체 제조 경쟁사가 아니라 특허관리전문회사(NPE)인 모놀리식3D라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2월에도 같은 업체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SK하이닉스의 사례는 국내 기업이 휘말리는 미국 내 반도체 특허 소송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해외 NPE가 국내 반도체 제조 대기업을 상대로 특허 침해를 주장하며 미국 연방지방법원에 시비를 가려달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특히 최근 반도체 업황 호조에 따라 한국 기업을 노린 특허 소송은 올해 역대 최다 수준으로 늘어났다.
■7건은 ‘특허 사냥꾼’ NPE
한국지식재산보호원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해 7월 말까지 5년 동안 국내 기업이 피소된 미국 내 반도체 특허 소송 24건 중 NPE가 제소 주체인 사건은 17건(70.8%)이다. 올해 국내 기업 피소 사건은 9건 발생했는데 이 중 7건(77.8%)은 NPE의 소송 제기로 벌어진 송사다. NPE는 생산 시설 없이 특허권을 사들인 뒤 이를 행사해 수익을 내는 업체다. 다른 기업이 자신들의 특허를 무단으로 썼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벌이고 합의금, 배상금, 로열티(사용료) 등을 받아내는 식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과 NPE가 뒤엉킨 특허 소송 증가 현상 배경에는 한국 기업을 상대로 금전적 이익을 수취하려는 NPE의 의도가 깔려 있다. NPE가 특허 침탈을 주장하는 대상은 보통 소송에 따른 합의금 혹은 배상금을 지불할 재무적 능력이 뒷받침되는 대기업이다. 반도체 초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되자 NPE들의 눈길도 자연스레 두 기업으로 향했다.
미국의 정책 환경도 특허 분쟁 증가를 부추긴 요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 행정부는 자국 기업의 특허권을 보호하는 정책 기조를 강화했다. 대표적인 예로 피소 기업들의 방어 수단인 특허무효심판(IPR)을 연방 특허청에서 반려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러한 정책 기조를 등에 업은 미국 NPE들의 활동은 이전보다 한층 활발해졌다.
반면 NPE와의 법정 다툼에서 한국 기업이 쓸 수 있는 수단은 마땅치 않다. NPE는 특허권을 행사할 뿐 그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 팔지 않기 때문이다. 제조사 간 분쟁이라면 자사 특허를 동원해 맞소송으로 반격할 수 있지만 NPE를 상대로는 대기업이 보유한 특허도 공격 카드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피소 기업들은 실제 침해 여부와 관계없이 소송 비용과 기업 이미지 악화 등을 우려해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HBM까지 표적
최근에는 메모리반도체 핵심 기술까지 분쟁의 표적이 되고 있다.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도 6월 NPE 마레 인피니터스로부터 HBM 관련 소송을 당했다. 두 회사 사건의 계쟁(분쟁) 특허는 HBM의 주요 기술로 꼽히는 3D 수직 적층 구조와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 등이다. 이들 기술은 HBM뿐 아니라 낸드플래시 등에도 쓰인다. 메모리 핵심 기술을 문제 삼은 소송인 만큼 업계는 분쟁이 다른 제품으로 번질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중견기업이 반도체 특허 소송에 휘말리는 일도 벌어졌다. 대만 발광다이오드(LED) 업체 에버라이트 일렉트로닉스가 2월 미국에서 서울반도체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냈다. 서울반도체가 반도체 관련 특허로 피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에버라이트는 직접 개발한 기술이 아니라 과거 다른 기업에서 사들인 특허를 근거로 소송을 걸었다. 대만 기업이 미국 법정에서 한국 기업과 맞붙었다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한국 기업이 소송을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올해 한국 기업이 제기한 미국 반도체 특허 소송은 9건으로 상당수는 한국계 NPE가 낸 소송이다. 지식재산 권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국내에서도 NPE 산업이 태동하고 있다. 국내 NPE가 중소기업이나 연구기관에서 특허권을 사들인 뒤 외국 기업을 상대로 권리를 행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반도체 특허 분쟁이 격화하면서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제한이다. 일부 소송은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를 통해 진행되는데 ITC는 조사 결과 특허 침해가 인정된 제품에 수입 배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 경우 해당 제품은 미국 내 수입과 유통이 제한된다. ITC 판단에 따라 대미 반도체 수출에 제동이 걸리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미국 내 반도체 특허 소송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노재일 한국지식재산경영협회장은 “ITC의 수입 배제 명령은 우리 산업의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며 “이제는 반도체 특허 분쟁을 전략 산업 통상 문제로 다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미흡한 국내 제도부터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윤모 지식재산전략포럼 운영위원장(전 산업통상부 장관)은 “한국은 핵심 산업의 특허 침해 회피를 돕는 지원책이나 국내외 특허권 수익화를 뒷받침할 제도를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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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김예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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