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잊지 마라. 이 두 말은 결국 하나다. 공동체는 무엇을 함께 기억하느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한다. 가족도, 종교공동체도, 국가도 공동의 기억 없이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갖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진짜 위험은 우리가 무엇을 함께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합의마저 흔들리는 것이다.
지금 미국이 마주한 위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은 혈통이나 종교, 단일한 문화 때문에 하나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을 받아들이고, 선거를 통해 권력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 온 중요한 힘이었다. 누가 이기느냐만큼 중요한 것은 패배한 쪽이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 있고, 승자 역시 정해진 절차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절차 자체가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추진한 우편투표 관련 행정명령을 둘러싼 소송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행정명령은 연방정부가 유권자 자격과 우편투표에 관한 새로운 규칙을 적용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23개 주와 워싱턴 D.C.가 소송을 제기했고, 연방법원은 일부 조항의 시행을 막았다. 지난 8월 24일 연방대법원은 6대3으로 하급심의 금지명령을 정지시켰지만, 행정명령 자체의 합헌성을 최종적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다. 관련 법적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당의 주장이 옳으냐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선거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신원 확인과 유권자 명단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선거관리의 상당 부분을 주정부가 담당하는 미국의 헌법적 구조에서 연방정부의 개입이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주의에서 이런 충돌과 논쟁은 있을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거의 결과만이 아니라 선거의 과정 자체를 서로 다르게 믿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개표 방식과 우편투표, 유권자 명단, 선거관리기관에 대한 신뢰가 정당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갈라진다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절차에 대한 공동의 믿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완승이 아니다. 누가 이기더라도 그 과정만큼은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선거관리의 투명성을 높이고, 관련 자료를 최대한 공개하며, 독립적인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 시민들이 선거 참관이나 개표 업무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정치인의 선언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확인한 공정한 경험이 축적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미국 민주주의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기억은 단순히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다. 공정하게 경쟁했고, 깨끗하게 승복했으며, 패배한 사람도 다시 민주적인 경쟁의 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기억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 기억이 무너지면 정권 하나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가 흔들린다. 그래서 미주 한인사회도 이번 선거를 결코 남의 일처럼 바라봐서는 안 된다. 2020년 기준 한국계 미국인은 약 150만 명에 이르고, 주요 경합주에서는 한국계 유권자가 아시아계 유권자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숫자는 크지 않지만 선거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동체다.
특히 한인 유권자들에게 우편투표는 중요한 선거 참여 수단이다. 그런데 선거 규칙이 바뀌거나 절차가 복잡해지면 익숙했던 투표 방식이 불편해지고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혼란이 투표에 대한 피로감과 불신으로 이어져 투표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걱정이 아니다. 지금부터 정확한 선거 정보를 확인하고, 달라지는 투표 절차를 알리고, 유권자들이 실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정치적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투표할 권리를 행사하고, 그 투표가 공정하게 집계되는 절차를 지키는 일은 모두의 몫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인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느 후보가 이기는가만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한 표를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다. 그것이 미국 민주주의 안에서 한인사회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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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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