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계절은 태양이 작열하는 8월을 지나고 있다. 한낮의 열기를 식히듯 간밤에 뿌려진 소나기로 뒤뜰 텃밭의 한여름 생명들이 싱싱하다. 흐르는 빗물에 말끔히 씻긴 청명한 허공에는 창백한 새벽달이 내게 무언가 건넬 말이 있는 듯 차창 위로 계속 따라붙는다.
신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과 교류하며 진정한 즐거움(樂)을 누리라고 태초에 말씀하셨다.
더해 가는 연륜과 함께 차츰 비어 가는 일상의 허한 공간을 열고 찾아온 자연과의 만남은 내게 또 하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앞만 보고 치달렸던 생활 속에서 멈춰 비로소 보이는 소소한 아름다움들, 리틀넥 베이가 바라보이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잡초인 듯 무성하게 그저 푸르기만 했던 풀잎들이 작디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며 스스로의 존재를 알린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바람에 살랑이며 달콤한 눈맞춤을 기다리는 듯하다.
비 온 뒤 피어오르는 짙은 흙내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해맑은 지저귐,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눈시린 은빛 햇살. 이렇듯 호흡하는 생명들을 마주하며 잊고 있었던 창조주의 진리를 되찾아 본다.
세상 속에 닳아지며 고갈되어 가던 감성과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서걱거림으로 지치기도 했던 기억들. 자연은섣부른 조언 대신에 서두르지 않고 오고 가는 섭리에 순응하며 위안을 준다.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 그들 사이를 걷다 보면 어깨를 붙들고 늘어지던 어지러운 상념들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벼워지기도 한다. 때로는 위대한주치의의 처방술과도 같다. 지루한 망설임과 나약해지는 의지들이 빗방울 머금은 싱싱함으로 조금씩 살아나는느낌이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자연은 결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반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제 자연은 내게 단순한 도피처나 휴식처를 넘어 삶을 온전히 누리고 즐기게 해주는 정다운 친구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둘러싼 모든 생명과 함께 온전히 살아 있음이 감사하다. 이것이 바로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진정한 즐거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미국의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시인인 메리 올리버는 그녀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원제: Long Life)』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Attention)이 곧 삶에 대한 헌신이자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글은 초로(初老)의 비어 가는 내어설픈 마음에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솔직한 본성과 생명력을 긍정하라” 는 위로의 말을 전한다.
또한 그녀의 시에서 높고 맑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우리가 때로 얼마나 깊은 고독 속에 있든 세상이 우리를 부르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시인은 위대한 깨달음이 먼 곳에 있지 않다고 했다.
뒷마당에 맺힌 작은 열매,잎사귀의 미세한 떨림을 경건하게,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오래도록 지켜보는 행위 자체를 영적인 의식이자 기도로 여겼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보살피는 애정 어린 글쓰기의 출발점이자 생명을 존중하는 가장 진실한 방식이라고 했다.
대자연은 슬픔이나 삶의 고단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나무가 폭풍우를 견디고 계절에 순응하듯, 우리 역시 상실과 나이듦을 순환으로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주어진 생애 동안 어둠에 잠겨 있기보다, 오늘 하루 마주한 작고 눈부신 것들에서 순수한 ‘기쁨’을 찾아보자.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텃밭을 거니는 자의 축복이며 대자연의 섭리에 올리는 깊은 감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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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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