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 영화 ‘오디세이’를 봤다. 여름 블록버스터 한 편을 즐기려는 마음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충분한 만족을 안겨줬다. 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여러 논란, 즉 영화가 과도하게 진보적이라는 공격에서부터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이런 논쟁들에 대해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거의 3,000년 전 이야기이고 신과 여신, 외눈박이 거인, 마법까지 등장하는 작품 아닌가!)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에즈라 클라인의 논평을 읽고 나니 영화가 제기하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게는 그 문제들이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클라인은 놀란의 ‘오디세이’가 트로이의 헬렌 역에 흑인 여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이유로 ‘워크(woke)’하다는 비판은 사소하고 피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가 훨씬 더 심오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이라고 본다. 놀란은 정복과 승리를 거리낌 없이 찬양했던 고대 세계의 도덕관을 보다 미묘하고 복합적인 도덕관으로 근본적으로 대체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영리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찬사를 받았다면,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전쟁이 남긴 참상과 승리의 핵심이었던 자신의 기만, 즉 트로이 목마 때문에 고통받는다.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서구는 노골적인 정복과 지배를 중시했던 이교적 윤리를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연민, 공감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로 점차 대체했다. 마태복음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호메로스의 영웅이라면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말이다. 최근에는 기독교 이전의 가치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포퓰리즘 우파가 새롭게 등장한 일부 테크 억만장자들과 종종 손을 잡고, 공감과 평등보다 힘과 지배,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과거의 세계를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에게는 ‘승리하는 것’이 전부이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 그는 ‘승리’라는 말을 끊임없이 사용한다. 2018년 ‘60분’ 인터뷰에서 브렛 캐버노를 성폭행 혐의로 고발했던 여성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에 대해 그가 했던 모욕적인 발언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트럼프는 단순히 이렇게 말했다. “상관없다. 우리가 이겼다.”
일론 머스크가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가드 사드는 베스트셀러 저서 ‘자살적 공감’에서 서구가 쇠퇴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외부인과 소수자, 심지어 적들에게까지 지나치게 마음을 쓴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2,000년 동안, 특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도덕적 성취는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동등한 존엄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범위를 확대해온 것이다. 우리는 한때 노예와 농노, 2등 시민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 즉 외국인과 여성, 인종적 소수자, 서로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됐다. 이러한 사상은 독립선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이것은 서구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이지, 퇴폐적인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거친 MAGA의 공격 아래에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비판이 숨어 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기했던 비판이며, 오늘날 일부 테크 업계 인사들이 이를 다시 꺼내 들고 있다. 니체는 기독교의 평등주의적 사상이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야망을 품고 위험을 감수하며 무모하게 행동할 가능성을 줄여놓았다고 우려했다. 우리는 너무 인간적이고 인도적으로 변한 나머지 우리를 영웅적으로 만들었던 원초적 충동을 잃어버린 것일까?
단지 영웅을 탄생시켰다는 이유만으로 피와 유혈, 정복 위에 세워진 문명을 낭만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문명들이 만들어낸 것은 영웅만이 아니었다. 피라미드와 고딕 양식의 대성당, 신대륙을 향한 탐험 항해, 산업혁명은 모두 야망과 자신감, 희생을 감수하려는 의지로 움직이던 사회에서 탄생했다. 그런 사회에는 흔히 위계질서가 존재했고 위대함을 향한 일편단심의 집중력이 있었다. 오늘날 포퓰리즘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유 중 일부는 구체적인 정책보다는 국가적 위대함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에 있다. 건설하고, 성취하고, 승리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위대함과 선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결국 19세기와 20세기의 서구 국가들은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회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결코 소심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했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세계를 산업화했고, 원자폭탄을 만들었으며, 유럽과 일본을 재건했고,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으며, 인터넷을 만들어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을 생각해보라. 현대적 복지국가를 만들고, 파시즘을 물리쳤으며, 고속도로와 공항을 건설하고,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으며, 노예제가 남긴 유산을 해체하기 시작했던 나라다. 이들은 엄청난 야망을 품은 문명들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해 사과해서는 안 된다. 세계의 위대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우리의 도덕적 세계를 확장하는 동시에 물리적 세계의 영역도 넓혀나가는 데 성공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러한 과거의 자유주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될지도 모르는 인공지능을 구축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신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지닌 엄청난 힘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중시하는 윤리와 가치 체계에 뿌리를 두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기독교가 개척했고 서구가 강력하게 발전시켜온 가치들이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정신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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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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