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핵화 질문을 회피하면서 ‘57개의 북한 핵무기’를 거론한 것은 북핵을 사실상 용인하려는 신호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우리 정부는 “비핵화가 (한미 간) 공통의 목표로 공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지만 미국이 대북 정책의 초점을 ‘비핵화’에서 ‘북핵 관리’로 옮길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회담 성과를 만들기 위해 주한미군 축소 등 한반도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19일(현지 시간) “그(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는 57개의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은 북핵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려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김 위원장과 연내 회동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히면서 김 위원장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의지도 거듭 내비쳤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대화의 목표가 여전히 비핵화인가’라는 질문에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며 대화를 끊었다. 2018년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합의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에서 한 발 물러난 듯한 모습이다.
이에 따라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이 견지해온 북한 비핵화라는 정책 목표가 유명무실해지고 사실상 북핵 용인으로 기조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접근법에서 벗어나 이미 핵을 보유한 현실을 인정하고 위기를 관리하려는 기조를 드러냈다”며 “향후 김 위원장과의 대화가 비핵화가 아닌 군축 및 핵 동결 중심의 협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조야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19일(현지 시간) 워싱턴포스트(WP) 기고에서 “북한은 약 6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약 30개를 추가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핵분열성 물질과 여러 종류의 운반 체계까지 갖추고 있다”며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평가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전적으로 지원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가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차 석좌는 “핵 비확산 정책은 대개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라며 핵보유국 지위 인정이 불가피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거래주의적 사고방식을 감안하면 북핵을 용인한 뒤 미북 대화가 본격화할 경우 주한미군 병력 축소 등이 협상 카드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연구센터장은 “이달 19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의 담화는 단순히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주한미군 병력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미 동맹 현대화 기조에 따라 주한미군의 지상 병력을 줄이고 해군·공군력 및 첨단 전략자산으로 대체한다는 구상이 미국에도 있을 터이고, 미북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충분히 의제로 던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도 “한국이 호르무즈해협에서 우리를 돕는 데 관심이 없다고 말했을 때 기분이 별로였다고 언급했다. 미북 대화 의지와 한국의 호르무즈해협 지원 여부를 재차 연결해 언급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동맹국과의 관계에서조차 ‘거래’를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한국 정부의 입장, 한반도의 안보 등에 개의치 않고 언제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압박을 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이 한국 내의 이러한 우려를 꼬집은 점도 눈에 띈다. 그는 이날도 이틀 연속 담화를 통해 “단 한번의 합동군사연습 축소에 국가안보가 통째로 흔들리는 나라가 한국”이라면서 “‘미한혈맹’의 주종관계구도를 선명히 그려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트럼프에게 낯간지러운 소리로 아첨하고 뒤에서는 자주국방을 운운한 리재명의 안팎”이라는 표현으로 이재명 대통령을 직격했다. 그러면서 “차라리 이 기회에 예속적인 자기의 처지나 제대로 학습하고 생존의 답을 찾으라”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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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규 서울경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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