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잎 밥
▶ 밥을 싸는 순간, 가을이 보인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유난히 정겹게 느껴집니다. 10월이 시작되면 식탁에도 계절의 색이 달라집니다. 여름 내내 즐겼던 가볍고 산뜻한 음식 대신 밤과 대추, 단호박처럼 은은한 단맛을 가진 재료가 생각나고, 따뜻하게 쪄낸 음식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이 좋아집니다.
저에게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잎밥입니다. 찹쌀에 밤과 대추, 연근, 콩 등을 넣고 연잎에 싸서 찌는 연잎밥은 화려한 양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음식입니다.
한 덩어리의 밥을 잎으로 감싸 쪄내는 모습도 정갈해서 평범한 밥 한 끼보다는 작은 선물처럼 느껴지곤 하지요. 하지만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국에서 흔하게 구하던 재료가 의외로 귀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연잎을 구하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바꾸어 미국의 아시아 식품점에서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는 바나나잎을 사용했습니다.
-재료
찹쌀 600g·물 1C, 청하 1T, 소금 1t, 단호박가루 1T(또는 쑥가루 1T).
부재료: 밤, 대추, 연근, 단호박, 호두, 잣 적당량, 서리태 100g, 강낭콩 100g, 바나나잎.
-요리법
1. 찹쌀을 씻어 불린 뒤 물, 청하, 소금, 단호박가루를 넣어 밑간한다.
2. 서리태와 강낭콩은 각각 미리 삶아 준비한다,
3. 호두와 잣은 팬에 살짝 볶는다.
4. 밤, 대추(돌려깎기), 연근(슬라이스), 단호박(조그마한조각)를 준비한다.
5. 1를 김 오른 찜기에 넣고 약 20분간 찐 뒤 한번 뒤집어 20분 더 쩌 준다.
6. 연잎 위에 한 줌의 밥과 위에 부재료 하나씩 올려 사각으로 감싼다.
7. 김오른 찜기에 다시 한번 찐다.
♣ 가을의 재료를 한데 모으다
이번 영양밥에는 찹쌀을 중심으로 물, 밤, 대추, 연근, 단호박, 서리태와 강낭콩을 넣었습니다. 호두와 잣은 팬에 살짝 볶아 고소한 향을 더했습니다. 재료가 많아 보이지만 각각의 역할이 분명합니다. 밤과 대추는 은은한 단맛을, 콩은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연근은 아삭한 식감을, 단호박은 부드러운 단맛과 색을 더합니다.
♣ 연잎 대신 바나나잎을 사용해 보니
처음에는 '연잎밥을 바나나잎에 싸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들어 보니 바나나잎은 넓고 탄력이 있어 찹쌀밥을 감싸기에 오히려 편했습니다. 찜기에 들어가면서 잎이 밥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밥과 고명의 향 이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졌습니다. 물론 연잎 특유의 향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리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원래 재료를 완벽하게 갖추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해 그 음식이 가진 정서와 맛의 방향을 살리는 것, 그것도 생활 속 요리의 즐거움이니까요. 특히 바나나잎에 싸인 밥을 찜기에서 꺼내 하나씩 펼쳐보는 순간이 좋습니다. 잎을 열면 노란 단호박과 붉은 대추, 갈색의 밤, 검은콩과 하얀 찹쌀이 어우러져 가을의 색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 찹쌀밥의 밑간이 맛을 좌우합니다
연잎밥이나 바나나잎밥은 양념장을 따로 곁들이기보다 밥 자체의 맛을 살리는 음식이기 때문에 찹쌀의 밑간이 중요합니다. 이번에는 찹쌀 600g에 물 1컵, 청하 1큰술, 소금 1작은술, 단호박가루 1큰술을 넣었습니다. 단호박가루 대신 쑥가루를 사용하면 은은한 초록빛과 향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팥물은 밥에 깊은 색과 은은한 구수함을 더해주고, 청하는 찹쌀 특유의 묵직한 향을 한층 깔끔하게 해줍니다. 소금은 단맛을 끌어내는 정도로만 넣는 것이 좋습니다. 고명 자체에 맛이 있기 때문에 밥을 너무 짜게 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 콩은 미리 익혀주세요
서리태와 강낭콩은 찹쌀과 함께 찌는 것만으로는 익는 정도가 맞지 않을 수 있으므로 미리 삶아 준비합니다. 서리태 100g은 물을 넉넉히 붓고 우르르 끓인 뒤 중불에서 8분 정도 삶습니다. 강낭콩 100g도 끓는 물에 약 10분 정도 삶아 준비합니다. 콩은 너무 무르게 익히기보다는 속까지 익되 형태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정도가 좋습니다. 그래야 찹쌀과 섞었을 때 으깨지지 않고, 완성된 밥을 한입 먹었을 때 콩의 식감도 살아납니다.
♣ 견과류는 살짝 볶아 향을 살립니다
호두와 잣은 그냥 넣어도 되지만 팬에 살짝 볶아 사용하면 향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기름을 추가하지 않고 약한 불에서 짧게 볶아 고소한 향이 올라오는 순간 불을 끕니다. 너무 오래 볶으면 잣이나 호두가 쉽게 탈 수 있으니 주의합니다.
♣ 바나나잎을 준비하는 작은 요령
바나나잎은 흐르는 물에 씻고 물기를 닦아줍니다. 잎이 여전히 뻣뻣하다면 따뜻한 물에 잠시 담그거나 아주 약하게 열을 가해 부드럽게 만들어 주세요. 너무 뜨겁게 가열하면 잎이 마르거나 색이 변할 수 있으므로 '살짝 유연해지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바나나잎은 연잎보다 크고 넓은 경우가 많아 한 장으로 밥을 넉넉하게 싸기 좋습니다. 찹쌀과 고명을 너무 많이 올리지 않고, 잎을 접었을 때 밥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만 담는 것이 모양을 예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 밥을 쪄내는 방법
준비한 바나나잎 위에 찹쌀과 고명을 올립니다. 밤, 대추, 연근, 단호박, 콩을 한쪽에 몰아넣기보다 밥 전체에 고르게 섞어 넣으면 한 덩어리를 잘랐을 때 재료의 색이 골고루 보입니다. 잎은 너무 팽팽하게 당기지 말고 밥이 익으면서 조금 부풀 공간을 남겨둡니다.
이렇게 만든 밥을 김이 충분히 오른 찜기에 올려 약 20분간 쪄냅니다. 찜기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바나나잎의 향, 밤과 대추의 달큰한 향이 어우러지면 부엌 전체가 가을 냄새로 채워집니다.
♣ 미국에서 만드는 우리 집 가을 음식
미국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다 보면 ‘한국에서 먹던 것과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될 때가 있습니다. 연잎을 구할 수 없으면 바나나잎을 쓰고,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로 바꾸어 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도 결국 우리 가족의 식탁에서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됩니다. 이번 바나나잎 영양밥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연잎밥의 전통적인 맛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가을의 재료와 잎에 싸서 찌는 방식을 살리고, 미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우리 집 식탁에 맞게 풀어보았습니다. 10월의 어느 저녁, 따뜻한 밥 한 덩이를 바나나잎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세요.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정성스럽고, 특별한 양념이 없어도 재료의 맛이 살아 있는 한 끼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잎을 펼치는 순간, 멀리 있는 고향의 가을 풍경도 잠시 식탁 위에 내려앉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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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권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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