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연구팀 “후성유전학 변화로 DNA에 분자 기억 남아…평생 스트레스에 취약”
어린 시절의 학대나 방임, 가정폭력 같은 심한 스트레스는 성인이 된 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왜 이런 영향이 수십 년이 지나도 지속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새로운 생쥐 실험 연구에서 어린 시절 스트레스가 뇌세포 안에 DNA가 포장되는 방식을 바꾸고, 이 변화가 뇌의 유전적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쉽게 활성화되게 해 성장 후에도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낮아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워싱턴대 의대와 프린스턴대 공동 연구진은 8일 과학 저널 뉴런(Neuron)에서 어릴 때 스트레스를 받은 생쥐의 뇌를 분석, 보상과 동기, 스트레스 반응 등에 중요한 복측피개영역(VTA)의 도파민 신경세포에 발생한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평생 스트레스 과민성을 만드는 생물학적 기전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공동 교신저자인 워싱턴대 미건 크리드 교수는 "이 연구는 어린 시절의 역경이 정신질환 취약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생물학적 과정을 밝혀낸 것"이라며 "이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표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의 DNA 염기서열은 평생 거의 변하지 않지만 DNA가 어떻게 접히고 풀리는지는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변화는 DNA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고도 어떤 유전자가 얼마나 쉽게 켜지고 꺼지는지 결정하며 이를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고 한다.
연구진팀은 이를 장난감 스프링인 '슬링키'(Slinky)'에 비유했다. DNA가 촘촘히 감겨 있으면 유전자에 접근하기 어려워 비활성 상태가 되고, 반대로 스프링이 늘어나 열리면 유전자가 쉽게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먼저 생쥐에게 생후 10~17일 동안 스트레스(ELS)를 경험하게 하고 성체가 될 때까지 정상적으로 키운 다음 뇌의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스트레스를 받은 생쥐는 VTA 영역에 있는 도파민 신경세포에서 DNA를 열린 상태로 만들어 유전자가 쉽게 활성화되게 하는 히스톤 화학 표지(H3K4me1)가 증가하고, 이를 만드는 효소(SETD7)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이 변화의 인과성을 확인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어린 생쥐의 뇌에서 SETD7만 인위적으로 증가시켰다.
그 결과 어릴 때 스트레스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이 생쥐는 성체가 된 후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유전자들의 발현이 더 크게 증가했고, 도파민 신경세포는 더욱 쉽게 흥분했으며 불안 행동도 증가했다.
반대로 어린 시절 스트레스를 받은 생쥐에서 SETD7의 작용을 억제하자, 도파민 신경세포의 과도한 흥분이 억제되고 성체가 된 뒤 스트레스를 받아도 사회성 감소나 탐색 행동 감소 같은 스트레스 취약 행동이 줄어드는 등 반대 결과가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는 어린 시절 스트레스로 생긴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억제하면 이후의 정신적 취약성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이 연구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단순히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DNA 포장 구조를 바꿔 미래 스트레스에 대비한 '준비 상태'(priming)를 만든다는 생물학적 기전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연구는 생쥐를 이용한 기초연구로, 사람에서도 같은 기전이 작동하는지와 SETD7을 표적으로 한 치료가 실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공동 교신저자인 프린스턴대 캐서린 젠슨 페냐 교수는 "이 연구는 어린 시절 스트레스가 뇌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명확한 생물학적 기전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발달 초기 적절한 돌봄과 치료, 사회적 지원이 후성유전체를 보호해 평생 이어질 스트레스 취약성을 예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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