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4일, 떠들썩했던 미국건국 250주년 독립기념일에는 기네스 기록에 도전한 불꽃놀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날 밤 불꽃놀이가 벌어지기 몇시간 전, 백악관은 세계최대 규모의 박물관·연구소 복합체인 스미스소니언을 공격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백악관 국내정책위원회가 작성한 162쪽의 이 보고서는 스미소니언 산하 21개 박물관과 14개 교육연구센터들 중에서 미국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을 콕 집어서 비난했다. 박물관의 250주년 기획전시가 “미국의 건국과 주역들을 제대로 기념하지 않는 잡동사니 같은 전시”이며 “미국이야기를 위대한 공화국에 걸맞은 방식으로 정직하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벤자민 프랭클린 등 건국 주역들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점이 문제가 됐다.
보고서는 또 다른 전시 ‘다양한 목소리, 하나의 국가’(Many Voices, One Nation)에 대해서도 맹비난을 퍼부었다. 전시는 다양한 이주민들이 아메리카원주민들과 어우러져 미국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백악관은 “건국 주역들에게 쏟아져할 관심을 정치운동과 현대의 불만으로 돌리고 있다”고 공격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청교도에 대한 솔직한 재평가, 드래그 문화와 LGBTQ 자료 등이 포함된 것이 트럼프 정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보고서는 현 스미소니언 지도부가 “미국역사를 정직하게 설명할 수 없는 급진적 활동가”라고 규정하고, 로니 번치(Lonnie G. Bunch) 사무총장과 앤시아 하티그(Anthea M. Hartig) 미국역사박물관 관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어 지도부의 교체 가능성이 우려된다. 두 사람은 모두 저명한 역사학자로서, 로니 번치는 흑인 최초의 스미소니언재단 사무총장, 하티그는 여성 최초로 미국역사박물관장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사실 이 전시들은 빌미를 제공했을 뿐, 스미소니언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선전포고는 지난해 취임 직후부터 시작됐다. 2025년 3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역사의 진실과 건전성 회복’(Restoring Truth and Sanity to American History)이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연방 역사기관들에게 ‘분열적’이거나 ‘반미적’인 역사 서술을 제거하고, 미국의 위대함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바꾸라는 지시였다. 이는 스미소니언이 인종, 식민주의, 노예제, 성차별 문제를 강조하고 억압과 차별의 역사를 과도하게 묘사하여 미국의 위대함을 훼손하고 있으니, 보다 더 ‘애국적인’ 방향으로 전시를 수정해야한다는 명령이었다.
스미스소니언은 1846년 의회에 의해 설립된 후, 당파적 정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7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두고 있다. 연방대법원장이 총장 겸 의장이고,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3명, 시민위원 9명, 그리고 부통령이 그들이다.
그런데 트럼프 취임 후 불과 4일 만에 측근인 플로리다주 하원의원 카를로스 히메네스가 새 이사로 임명되었고, 히메네스가 전시 검토절차를 문제 삼은 뒤 몇 주 지나지 않아 트럼프는 국립초상화미술관 관장 킴 사제트(Kim Sajet)의 해임을 선언했다. 그녀가 지나치게 당파적이고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의 강력한 지지자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어 작년 8월, 백악관은 스미스소니언 산하 8개 박물관에게 현재 진행 중이거나 계획된 전시를 검토하겠다며 전시 설명 문구부터 웹사이트, 소셜미디어 콘텐츠에 이르는 모든 자료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올해 독립기념일을 기해 발표한 미국역사박물관에 대한 강력한 비판 보고서로 나타난 것이다.
백악관의 보고서는 즉각 역사학자들의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역사학회는 6일 성명을 통해 “역사에는 영광뿐 아니라 노예제, 원주민 강제이주, 인종차별 같은 불편한 사실도 포함되어야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시내용을 검열하거나 수정하면 학문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박물관은 권력의 선전기관이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의 이러한 행보는 보수적 이념과 맞지 않는 대학이나 문화 예술계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의 연장선이다. 트럼프는 수억 달러 규모의 연방자금 지원 중단을 무기로 아이비리그 대학들에게 일련의 정책 변경을 강요해왔다. 또 케네디 공연예술센터의 이사장직에 스스로 앉고, 자신이 임명한 이사회를 통해 프로그램을 개편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법원 명령으로 떼어낸 일과 같은 맥락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극우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언론 길들이기와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가 시작된다. 나치의 퇴폐미술 공격,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술이 체제선전용으로만 사용되는 것, 한국에서도 보수정권 때마다 블랙리스트가 등장하는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 서술에 관한 통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국가 기반인 미국에서는 이제껏 아무리 보수적인 공화당 출신 대통령도 예술기관에 대해 이처럼 과격한 검열을 시도한 적이 없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국제정세를 뒤흔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국내에서 역사와 문화의 전쟁을 시작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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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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