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연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평소 흠모해마지않던 뉴욕시티 발레(New York City Ballet)가 오늘부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7회 공연을 펼친다. 이 발레단이 LA에서 가졌던 마지막 무대가 2004년이었으니, 무려 22년 만에 찾아온 귀한 손님이다. LA거리 곳곳에 붙어있는 공연깃발은 무용계와 팬들의 따뜻한 환영을 보여준다.
뉴욕시티 발레는 20세기 이후 현대 발레의 흐름을 바꾼 세계적인 공연단체다. 발레계의 최상위권에 꼽히는 파리오페라 발레, 로열 발레, 마린스키, 볼쇼이, 그리고 아메리칸 발레(ABT)가 모두 오래된 전통과 웅장하고 화려한 클래식 레퍼토리를 고수한다면, NYCB는 현대적 스타일의 ‘미국 발레’를 창조한 최초의 무용단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미국의 양대 기둥인 ABT와 NYCB는 같은 뉴욕에 있지만 추구하는 스타일은 크게 다르다. ABT는 백조의 호수, 지젤, 로미오와 줄리엣, 잠자는 미녀, 돈키호테 등 유럽전통의 클래식 명작들 위주로 공연한다. 스토리 중심의 느리고 우아한 작품들인 만큼 의상과 무대가 화려하고, 테크닉과 연기력이 뛰어난 주역 댄서의 비중이 매우 크다. 과거 미하일 바리쉬니코프와 나탈리 마카로바가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던 ABT는 스타 무용수 영입에 적극적이어서 현재 한국의 서희와 안주원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뽑혀온 17명의 수석무용수들이 무대를 빛내고 있다.
반면 뉴욕시티 발레(NYCB)는 1948년 전설적 안무가 조지 발란신이 설립한 발레단으로, 스토리보다는 음악을 동력 삼아 빠르고 역동적이며 현대적이고 간결한 춤으로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한껏 드높인다. 유럽의 고전주의 발레를 새롭게 혁신한 ‘신고전주의 발레’를 창시자 발란신은 NYCB를 통해 ‘미국 발레’를 정립했다.
신고전주의는 일종의 추상발레로, 스토리보다 음악이 중요하고, 주역보다 군무의 조화와 정확성을 강조하는 컨템포러리 스타일을 추구한다. “춤은 음악을 눈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발란신의 철학은 화려한 세트보다 간결한 무대, 음악을 몸으로 표현하는 ‘운동선수 같은 무용수’를 태동시켰고, 오늘날 세계 주요 발레단들이 사용하는 현대 발레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출발했다.
댄서들은 자체 운영하는 유명한 아메리칸 발레스쿨을 통해 양성하는데, 몸 자체도 달라서 날렵하고 빠른 발놀림을 보여주는 긴 팔과 다리는 ‘발란신 바디’라는 표현까지 만들어냈다. 90여명에 달하는 NYCB의 무용수들은 모두가 주역이라 해도 좋을 만큼 테크닉과 표현력이 뛰어나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댄서는 20년 넘게 현역인 타일러 펙과 그의 남편 로만 메히야, 새라 먼스, 미라 네이단 등으로 이번 LA 공연에 모두 출연한다.
NYCB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가져왔다. 24~26일 3회 공연되는 프로그램 A는 현대적 에너지와 역동성이 폭발하는 젊은 안무가들의 컨템포러리 발레의 정수를 보여준다. 27~28일 4회 공연되는 프로그램 B는 조지 발란신의 걸작들을 중심으로 바흐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시각화한 작품들이 공연된다.
특별히 기대되는 것은 무용수 출신의 두 안무가 저스틴 펙과 타일러 펙(가족관계 아님)의 작품들이다. 저스틴 펙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The Times Are Racing)는 토슈즈 대신 운동화를 신은 무용수들이 힙합과 스트릿 감성을 더하며 젊고 열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한다.
수석무용수 타일러 펙의 첫 안무작인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는 페이스가 빠르면서도 감미로운 작품으로, 프랑시스 풀랭의 음악을 한인 피아니스트 해나 김과 스티븐 고슬링이 라이브 연주한다.
한편 이 공연은 지난해 타계한 예술후원가 글로리아 코프만(Glorya Kaufman, 1930~2025)의 추모 헌정공연으로 이루어졌다. 코프만은 LA 지역의 무용과 공연예술 분야에 집중 지원하며 크나큰 문화적 유산을 남긴 자선사업가다.
어린 시절부터 춤을 좋아했지만 정식 무용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는 남편의 유산을 통해 예술의 후원자로 거듭났다. 남편 도널드 브루스 코프만은 1957년 일라이 브로드와 함께 주택개발회사를 세우고 훗날 60만채의 주택을 건설한 거대기업(KB Home)을 일궈낸 인물이다. 하지만 1983년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아내 글로리아 코프만은 남은 삶을 예술후원 활동에 바치기 시작했다.
2009년, 그녀는 뮤직센터에 2,000만 달러를 기부하여 그의 이름을 딴 댄스 시리즈(Glorya Kaufman Presents Dance at The Music Center)를 탄생시켰고, 덕분에 LA 주민들은 로열 발레, 조프리 발레, 함부르크 발레, 앨빈 에일리 등 세계 정상급 무용단들을 정기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USC 무용학교를 만들었고, UCLA 글로리아 코프만 댄스 디어터를 지었으며, 줄리어드와 앨빈 에일리 스쿨도 정기적으로 지원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 LA 무용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LA를 춤추게 한 이 여인에게 추모와 함께 감사와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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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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