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 확산을 지원할 재단이나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랜 기간 제기돼 왔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대개 회의적이었다. 공직자들은 한국이 강대국이 아니어서 민주주의 외교를 펼치기 어렵다거나 타국의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행위가 자칫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한국 여론 지도층은 한국 민주주의가 걸어온 서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는 한다. 하나는 압축적 경제발전과 평화적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위기 때마다 평화적 시민 저항으로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아내고 있다는 역동성의 서사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이러한 시민운동의 자산은 분명 우리의 큰 자랑거리다.
그러나 위대한 서사는 감동을 주는 스토리에 그칠 뿐 국제사회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상품이 될 수 없다. 이제는 한국도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민주주의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전담할 국제적 민주주의 재단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 오늘날 한국은 해외 민주주의를 지원할 만큼 국력이 무르익었다. 세계 주요 7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7 플러스’의 위상을 갖고 있으며 유엔 제9위의 재정 기여국이자 세계적 문화 강국으로 불린다.
해외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방식은 주로 행정 부처나 의회를 활용한다. 미국 국무부는 민주주의·인권·노동국(DRL)을 통해 글로벌 인권 정책을 수립해 왔고 국제개발처(USAID)는 개도국의 선거 시스템과 반부패 정책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다만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이러한 기능이 크게 약화한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스웨덴은 국제개발협력청(Sida)을 통해 대외 원조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두며 영국 역시 외교연방개발부(FCDO)를 통해 지원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행정부가 직접 집행하는 방식은 늘 ‘정치적 독립성’과 ‘정책적 연속성’의 문제를 낳는다. 이 때문에 정부 예산을 쓰되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 사업의 일관성을 도모할 수 있는 ‘비정부 기구’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민주주의기금(NED)이 대표적이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영국 의회 연설을 계기로 법제화된 NED는 법적으로 민간 비영리단체다. 하지만 미 의회가 승인한 연방 예산(약 3억 달러)으로 운영되며 최근 전 세계 90여 개국 1900여 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민주주의재단(WFD)은 비정부공공기관(NDPB) 형태를 띤다. 예산 대부분을 외교연방개발부(FCDO)의 원조 자금(약 230억~250억 원)에서 조달하지만 영국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 경험을 전수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이사회는 원내 정당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초당적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현재 중동·아프리카·아태 지역 등 50여 개국에서 의회 역량 강화와 선거 지원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 중이다.
아시아에서는 2003년 출범한 대만민주주의기금(TFD)이 유일무이한 사례다. 연간 60억~75억 원 규모의 예산을 외교부로부터 전액 지원받아 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와 인권 운동가를 돕는다. 헌정 관례상 입법원장이 당연직 이사장을 맡고 여야 정당이 의석 비율대로 이사회에 참여한다. NED처럼 법적 지위는 민간 재단법인이지만 외교부와 긴밀히 밀착된 제2트랙 공공외교 기구다.
현재 한국의 경우 무상 원조 집행 기관인 국제협력단(KOICA)이 유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수원국 정부와의 협정을 바탕으로 한 ‘정부 간 원조(G2G)’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타국의 민간 시민사회를 직접 지원하는 데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도 원조 자금을 활용하되 외교적 유연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의회가 거버넌스를 주도하는 해외 사례를 적극 벤치마킹해야 한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대한민국만의 민주주의 지원 기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타국의 민주주의를 돕는 임무가 결국 우리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위대한 서사를 넘어 이제는 실천적 제도로 화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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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종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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