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태 전 뉴욕대한체육회 회장
▶ 노량진 수산시장서 최연소 중계인으로 삶의 현장 감각 익혀

김일태 전 뉴욕대한체육회 회장(사진)
▶씨름 3단·유도 4단·태권도 2단 유단자⋯강하고 부드러운 리더십 장착
▶이민후 다시 수산업 종사⋯체육계·교계 넘나들며 리더십 발휘
뉴욕 한인사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직책이나 명함보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시대를 지나온 사람이 있다. 그들 중 하나를 들라면 ‘김일태’란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뉴욕대한체육회장이었고, 뉴욕한인교회협의회 이사장이자 감사였으며, 뉴욕한인회 이사도 네 차례나 역임했다.
그는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섰고, 때로는 갈등의 한복판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역할을 관통하는 문장은 오로지 하나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먼저 나선다.”
그의 인생 스토리는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다. 대신 현장성, 추진력, 개혁성이라는 세 단어로 설명되는 실천의 기록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뿌리
1960년 1월,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김일태는 10세대가 함께 사는 공동체적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사람 중심’의 태도는 이미 이 시절부터 형성된 셈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부모를 따라 서울로 상경한 뒤 그는 해군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복무를 시작한다. 이때 그는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는다.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18세가 되면 자립해야 하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결심한다. “젖소 두 마리만 길러도 5년 뒤면 한 명의 자립을 도울 수 있다.” 그 생각 하나로 해군의 장학금으로 방송통신대학의 축산학을 선택했고, 그 현장인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직접 수학했다. 그러나 2학년때 축산업에 불황이 닥치며 그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학업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져 중단했다.
■‘현장형 리더’의 탄생
축산업을 접은 그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어머니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어머니가 하던 사업은 한 품목에서 전국 최고 판매량을 기록, 그는 당시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최연소 중계인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매주 부산에 내려가 큰 상인들과 거래하며 이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 등, 이 사업에서 중계인 5년 포함, 총 10년 동안 현장에서 몸으로 운영 감각을 익혔다.
이 시절은 그에게 조직 운영, 현장 판단, 사람 관리라는 세 가지 능력을 완성시킨 시간이었다.
이 경험은 훗날 뉴욕대한체육회와 교협에서 그가 보여준 ‘현장형 리더십’의 기반이 된다.
■몸으로 익힌 승부의 세계
김일태 회장은 씨름 3단, 유도 4단, 태권도 2단의 유단자다. 그의 운동 경력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만든 중요한 축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씨름, 군대에서 익힌 태권도, 경찰학교 교관에게 배운 유도, 전국학생유도대회 3회 입상, 동작구 씨름대회 우승, 서울시 대표로 전국대회 출전, 1999년 서울시 대회 우승으로 ‘장사’ 칭호 획득이 모든 경험은 그를 강하지만 부드러운 리더, 원칙적이지만 사람을 챙기는 리더로 만들었다.
■뉴욕 이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다
2000년, 그는 뉴욕으로 이민을 온다. 그리고 한국에서 하던 관행대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물량을 수출한다는 생각으로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수산업을 시작한 것이 20년 넘게 본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사업 현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한인사회 조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행사 준비, 갈등 조정, 예산 관리 등... 그는 늘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일태 형은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이 성향은 훗날 체육회와 교협에서 그의 리더십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된다.
■뉴욕교협 감사로 이사장으로 봉사
그는 교협 감사로 활동하며 재정 문제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정확한 보고서를 남겼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보고서였지만 공동체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기도 속 존칭 삭제 논쟁에서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문화적 충돌이라는 본질을 짚었다. 그의 제언은 명확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 *사람을 높이는 존칭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나 문화적 정서도 고려해야 한다 *양쪽을 조정하는 것이 교협의 역할이다.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대신 본질을 말했다. 그가 참여하면 갈등이 잘 조정되고 화합이 잘 이루어졌다. 그는 말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많이 안타깝다.”
■‘말’ 보다는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직설적이다 ▲행동이 빠르다 ▲결정이 명확하다 ▲책임은 본인이 진다 ▲그러나 사람을 챙길 때는 세심하다
체육회장 시절, 행사 준비를 하고나면 반드시 봉사자들에게 식사를 챙겨주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신앙과 가족 -그의 삶을 지탱한 힘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말한다. “언젠가 하나님을 마주할 그날, 아주 조금이라도 덜 민망스럽기 위해 오늘을 산다.” 그의 신앙은 그의 리더십과 삶의 태도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지탱해온 힘이었다. 그리고 그를 또 단단하게 만든 것은 그의 곁을 늘 지켜주는 아내 김명진 여사와 세 딸의 힘이 있었다. 그는 현재 성공회 뉴욕한인교회에서 헌신하고 있다.
■한 사람이 남긴 용기, 한 시대의 방향을 바꾼다
김일태 회장의 일대기는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다. 대신 현장에서 묵묵히 부딪치며 만들어낸 실천의 기록이다. 그는 늘 말했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게 나라도 괜찮다.” 그 한마디가 그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문장은 그가 지나온 긴 세월의 궤적을 압축한다.
“한 사람이 남긴 용기는 결국 한 시대의 방향을 바꾼다.”

김일태(뒷줄 맨 왼쪽) 회장이 달라스 체전의 성공적인 결실을 위해 체육회 임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전미체전 뉴욕 유치 등 불가능을 가능으로”
■ 뉴욕대한체육회장으로서 업적
뉴욕에 와서 씨름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다 보니 씨름협회 회장이 되고 마침내 그는 2017년, 뉴욕대한체육회 회장에 오른다.
그는 이미 한국에서 조직 운영을 경험했고, 체육계에서 일찍이 발을 들여놓아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할 일은 한다. 원칙은 지킨다. 사람은 챙긴다.”라는 신념으로 19대, 20대 4년과 코로나로 인해 1년을 더해 5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그가 남긴 업적중 가장 큰 것은 전미주체전 뉴욕 유치다. 그는 말했다. “뉴욕이면 된다. 뉴욕이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타 지역과의 치열한 경쟁 ▲인력 부족 ▲안전 문제 ▲뉴욕 내 단체 간 조율 등.
그는 2018년 조직위원회를 결성하고 매주 회의를 열어 행사 일정, 규모, 장소, 숙소, 예산 등, 모든 세부사항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낫소카운티 담당자들과의 미팅 단계에서 코로나19가 터졌다. 당연히 2021년 개최는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서 그가 준비한 모든 시스템은 뉴욕에서 2023년 열린 전미주체전에 그대로 도입되었고 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체육회 관계자들은 말한다. “체육회는 김일태 회장 시절이 가장 활발했다.”
이런 결과는 한인사회의 도움과 체육회 가맹단체의 협력, 그리고 집행부 임원들의 단합된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김 회장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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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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