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비용을 지급하고 볼 안쪽을 긁어내거나 침을 모아서 우편으로 보내면 유전자 분석을 통해 조상의 기원과 이주 경로를 알려주는 서비스가 크게 유행했다. 그 시조격인 23andMe가 20년 동안 급성장한 후 2025년 파산 신청을 겪는 와중에도 유사한 서비스 회사들은 속속 생겨났다. 이들은 나의 조상이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준다. 몰랐던 친척을 찾아주기도 한다. 언젠가부터는 내 유전체에 수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몇 퍼센트나 섞여 있는지도 친절히 알려준다. 내 조상 중에 네안데르탈인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너무 당연해서 재미난 화젯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네안데르탈인은 ‘남들에게 내놓기가 창피한 조상’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발견되어 온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을 바탕으로 추정된 모습은 구부정한 자세, 두꺼운 눈두덩 밑의 게슴츠레한 눈, 뒤로 젖혀진 이마를 갖고 있었고, 온몸은 덥수룩한 털로 뒤덮여 있었다. 20세기 초 라샤펠에서 발견된 화석은 관절염을 심하게 앓던 노인의 뼈였지만, 이 모습은 네안데르탈인의 지적, 신체적 열등함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소비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인을 자처하던 유럽인의 조상일 리가 없었다. 그들이 바란 자랑스러운 조상은 훤칠한 이마와 굳게 다문 입매에 한 손에는 무기나 도구를 든 모습이어야 했다. 절대로 조상일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던 네안데르탈인의 대안으로 내세운 크로마뇽인의 우상화된 이미지였다.
그렇기에 1990년대 유전학자들이 고인류 화석의 DNA를 분석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와 피를 섞지 않고 사라진 단순한 진화의 곁가지”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을 때, 구미 사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개하다고 여긴 네안데르탈인을 족보에서 깔끔하게 떼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한층 발전된 핵 DNA 분석 기법은 현생 인류의 유전자 속에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 명확히 남아 있음을 입증했다. 네안데르탈인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조상 중 하나였다.
네안데르탈인을 조상으로 인정하기 거부했던 오만함 속에는 사실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조상’이라는 개념 자체의 오해가 깔려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조상’은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물론 조상과 후손 사이에는 생물학적인 관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조상은 하나의 후손을 만들어낸 생물학적 조상 전체를 아우르지 않는다. 나의 바로 윗세대 조상은 부모 2명이다. 두 세대 위 조부모는 4명, 세 세대 위 증조부모는 8명, 네 세대 위 고조부모는 16명으로, 조상의 수는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조상은 주로 족보를 따져 올라가는 사회적 조상이다. 내 부모는 2명이지만 성씨는 한쪽 성 姓만 따르기 때문이다. 세대마다 내게 성씨를 물려주는 한 명만 조상으로 기억된다. 내 증조부모는 8명이지만 그중 단 한 명만 내게 성을 물려주었다. 생물학적으로는 8명 모두 확률적으로 비슷하게 내게 유전자를 나누어 준 조상이 되겠지만 말이다. 나뭇가지의 끝에서 출발해 하나의 단단하고 정갈한 나무 몸통으로 수렴하는 깔끔한 족보는 생물학적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의 족보는 눈에 보이는 단일한 줄기가 아니라, 땅속에서 온갖 방향으로 엉키고 엮여 있는 거대한 뿌리에 훨씬 가깝다.
결국 “나의 진짜 조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땅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천수만 개의 뿌리 중 내 눈에 가장 멋지고, 웅장하고, 자랑스러워 보이는 뿌리 하나만을 골라내어 자기 왕관에 장식하고 싶어 하는 선택적 욕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화석에서 추출한 고유전체를 분석한 연구들은 속속 우리의 선택적 욕망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조상에는 네안데르탈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베리아 동굴에서 발견된 데니소바인도 있다. 아직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아 유전학자들이 “X 집단” 혹은 “유령 조상”이라 부르는 미지의 고인류 조상들도 우리 핏속에 숨 쉬고 있다.
눈에 보이는 자랑스러운 뿌리 하나만을 조상으로 삼으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땅속 깊은 곳에서 사방으로 엉켜 있는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마주하게 된다. 그 이름 없는 ‘유령 조상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몸속에 흐르는 수많은 낯선 조상은, 어쩌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자랑스러운 조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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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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