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8월을 특별하게 기념한다. 한국은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고 평화와 부강의 결의를 다진다. 일본은 패전의 역사를 돌아보고 국제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공언한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응 차이는 여전히 크지만 미래지향적 파트너십에 무게를 둔 지도 오래다. 양국 정상의 올해 8월 15일 기념사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양국 국민 역시 한일 관계를 중시한다.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 국제문화회관이 실시한 공동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9%, 일본인 57%가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상대국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한국인 37%, 일본인 25%만이 그렇다고 답해 여전한 ‘신뢰 갭’을 드러냈다. 정치 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쉽사리 불신이 조장되는 한일 관계인 만큼 정부와 국회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신뢰 증진 노력에 열심히 나서야 함을 보여준다.
다행히 호감도는 양국 모두 상승세다. 최악이던 2020년 한국인의 대일 호감도는 12%에 불과했으나 올해 공동 조사에서는 54%까지 올랐다. 일본 역시 2019년 20%에서 올해 35%로 개선됐다. 여행, 대중문화, 상품 소비 등 생활 속 체험이 주효했다. 특히 일본 방문 경험자는 미경험자보다 좋은 인상을 가질 확률이 23%포인트 높았다. 직간접적 교류 저변이 넓은 2030세대가 다른 세대보다 한일 관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다만 양국 국민이 기대하는 협력 분야에는 온도 차가 존재한다. 한일 관계가 중요한 이유로 안보 협력을 꼽은 일본인은 58%인 반면 한국인은 44%에 그쳤다. 반면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꼽은 비율은 한국인(48%)이 일본인(33%)보다 높았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한국에 안보 협력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영역이지만, 중국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는 일본에는 시급한 과제다.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에는 한국인이 보다 적극적이어서 37%가 동의했지만 일본인은 9%에 불과했다. 한국을 여전히 대등한 경제 파트너로 보지 않는 시선이 반영된 결과다.
여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양국 지도자의 역할과 실행력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전임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취임하면서는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올 1월 일본 나라현에서 2차 회담, 5월에는 안동에서 3차 회담을 가졌다.
1월 회담에서 한일 정상은 단골 의제인 대북 공조와 조세이 탄광 유해 신원 확인 등 과거사 문제 외에도 경제안보, 과학기술, 인공지능(AI), 지식재산권 보호, 초국가 범죄 공동 대응까지 협력 범위를 넓혔다. 최근에는 불안정한 중동 정세를 반영해 공급망과 액화천연가스(LNG), 원유 등 에너지 분야 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 한국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 지지를, 일본은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과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해제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 타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북중러 밀착이 강화되는 엄중한 정세 속에서 한일은 실질적 협력에 속도를 내야 한다. 정치·군사적 안보 협력이 단기간에 어렵다면 우선 ‘경제안보’에 집중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일방적 관세 압박과 중국의 자원 무기화 및 덤핑 공세 속에서 유럽이 역내 경제안보 연대를 강화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중 의존도는 높지만 자체 레버리지가 부족한 한국이 경제안보의 공동전선을 펼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파트너는 일본이다. 희토류, 에너지, 핵심 산업 부품 등 공급망 교란에 따른 위험 요인을 동일하게 공유하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 정부는 경제안보의 구체적 협력 항목과 레버리지 확보 방안을 양국의 관련 기업들과 함께 모색해야 한다.
통상과 금융의 세계화는 정보를 꿰뚫어보고 네트워크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막강한 파워를 강대국에 쥐여줬다. 비대칭적 상호 의존성을 강대국이 무기화하는 사태를 적절히 제어하려면 중견국들은 상호 협력을 통해 회복 역량을 키워놓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 주권도, 지속 가능한 성장도 지켜낼 수 있다. 그 시발점이 될 한일 경제안보 협력을 성공시키기 위한 양국 지도자의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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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종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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