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을 앓는 아이가 발달이 더디다면 주저하지 말고 유전자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습니다.”
14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고아라 소아신경과 교수는 “원인 유전자를 알면 그에 맞는 약물을 선택해 더 정밀하게 치료할 수 있고, 향후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증상에도 미리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 뇌전증 환자들은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병원을 전전하는 ‘진단 방랑’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뇌전증 관련 유전자만 2,000개가 넘는 탓이다. 유전자 검사가 도입된 뒤에도 초기엔 의심되는 유전자를 하나씩 확인해야 해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량의 유전자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게 돼 뇌전증 진단 속도는 물론 정확도도 높아졌다.
고 교수는 “유전자 검사를 주저하는 부모가 여전히 적지 않다”고 전했다. 아이의 뇌전증이 유전적 원인 때문이라면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죄책감을 느낄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난치성 발달성 뇌전증의 유전자 이상은 대부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서 새롭게 발생한 돌연변이”라며 “불필요한 죄책감 때문에 유전자 검사를 꺼리기보다 조기에 원인을 확인해 아이에게 맞는 치료와 관리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아이가 어떤 증상이 있을 때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합니까.
“소아 신경질환 가운데 발달 지연이 있는 뇌전증 환자가 주요 대상입니다. 소아 뇌전증 환자의 절반 정도는 발달이 정상적이고 약만 잘 챙겨 먹으면 일상생활에도 무리가 없어요. 신생아 시기 저산소성 뇌손상 같은 구조적 원인으로 뇌전증을 앓기도 합니다. 뚜렷한 구조적 원인이 없는데도 경련과 함께 언어·인지·운동 등에서 발달이 지연된다면 유전자 검사를 고려해야 해요.”
-부모가 자책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이가 유전자 이상으로 뇌전증을 앓는 경우 많은 부모가 병을 물려줬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유전적 원인이 있다’는 것과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유전’이란 표현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소아 난치성 발달성 뇌전증은 아이에게서 새롭게 발생한 변이가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유전적 원인을 확인하면 왜 병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고, 의료진과 보호자가 같은 팀이 돼 앞으로의 치료를 준비할 수 있으니 부모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원인 유전자를 알면 치료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우선 약제 선택에 도움이 돼요. 같은 경련이어도 원인 유전자에 따라 쓰면 안 되는 항경련제가 있고, 반대로 특정 약물을 쓰면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대사 이상 질환에 따른 뇌전증은 대사 과정을 조절하는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독성물질이 쌓이거나 뇌신경 세포에 에너지가 공급되지 못해 경련을 하는데, 원인 유전자를 알면 식이요법을 하거나 특정 비타민을 복용하는 식으로 맞춤 치료를 할 수 있어요. 유전자에 따라 경련 기전이 다르기 때문에 보다 정밀하게 치료 방침도 세울 수 있고요. 처음에는 신경학적 증상으로 나타나다가 이후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거나 다른 장기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원인 유전자를 알면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예측해 대비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치료는 현재 어느 정도까지 왔습니까.
“굉장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치료가 가장 많이 활용되는 질환은 척수성 근위축증(SMA) 같은 근육병입니다. 이는 특정 유전자(SMN1)의 결손이나 돌연변이로 SMN 단백질이 부족해지는 질환인데, 비슷한 다른 유전자(SMN2)의 기능을 조절해 SMN 단백질 생성을 늘리거나 정상적인 SMN1 유전자로 대체하는 치료가 실제 이뤄지고 있어요. 반면 뇌전증은 근육병과 달리 특정 유전자의 기능이 과도한 탓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아요. 유전자의 발현 자체를 조절해 기능을 낮춰야 하기 때문에 접근이 더 까다롭습니다.”
-개인 맞춤 유전자 치료 연구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뇌전증은 같은 유전자에 이상이 있어도 환자마다 유전자 변이의 위치와 형태가 달라요. 환자의 유전자 변이가 지닌 특성을 분석한 다음 그에 맞춰 유전자의 기능을 억제하거나 끌어올리는 방식입니다. 미국에선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에 한해 대규모 임상시험 없이 세포 수준에서 유효성 검사를 하고, 안전성은 쥐를 대상으로만 확인한 뒤 곧바로 투여하는 패스트트랙을 운영하고 있어요. 세브란스병원도 환자 2명을 대상으로 맞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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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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