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일까. 길바닥에 손바닥 선인장이 부러져 나뒹굴고 있다. 가시 하나 없는 어린 잎새를 머리에 이고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리저리 흐트러진 흙 부스러기와 연필나무 작은 잎들이 어지럽다. 한쪽엔 구멍 난 잎새, 다른 쪽 밑동엔 하얀 상처 ? 잔잔한 이빨 자국이 드러나 있다. 눈물조차 말랐나 싶은 모습이다. 아침의 잿빛 하늘이 오늘따라 무겁다.
가시배 선인장 곁에 다가선다. 거칠고 투박한 패드에 뚫린 구멍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이 갔다. 긴 세월 뙤약볕 속에서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이렇게 휑한 가슴이 되었을까. 그 구멍을 안고서도 새 잎을 틔우고, 또 잃기도 하며 살아온 생이다. 웃는 듯 담담하다. 찡그리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거지요.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도 괜찮아요.’ 그 말이 들리는 듯해 나는 그 모습을 자주 찾았다. 그 회복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치료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물어간다. 살다 보면 마주치는 내 묵은 회한이 그 앞에서 조금씩 가라앉곤 했다.
백년초의 구멍이 어둠을 머금고 있다. 빛이 닿지 않는 그 자리에서 오래된 기억이 돋아온다. 엄마의 가슴에도 저것과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어무이’의 하루는 늘 그림자 쪽에 기울어 있었다. 3남 1녀를 키우느라 웃음은 드물었고, 그마저 피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대안 없는 생애, 나는 그 그림자에 또 하나의 구멍을 더했다.
대학에 들어가던 해, 엄마가 어렵사리 준비한 첫 등록금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암담했다. 다행히 두 오빠 덕분에 해결은 되었다.그날의 캄캄함이 아직도 드리워져 있다. 딸의 졸업이 엄마의 꿈이었을까. 좀처럼 가계를 쉬지 않는 엄마가 나들이를 했다. 졸업식 날, 엄마는 먼 길을 와서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그날의 빈자리, 그 자리 위에 떨어졌다는 눈물 한 방울이 지금도 내마음의 바닥에서 마르지 않는다. 백년초의 상처는 아무는 듯하지만, 엄마의 아픔은 잔향처럼 오래 남아 있다.
빛은 이동한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바라는 쪽을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엄마의 원은 자신의 고단한 삶을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또 다른 구멍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핑계 삼아 엄마를 두고 멀리 타국으로 떠나온 것이다. 장차 단 한 번만이라도 말할 수 있을까.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생명의 지향’이라 포장해 보지만, 백년초 저 빈 구멍 사이로 부는 바람처럼 허허롭다.
다음날 다시 들여다보니 백년초 밑동의 하얀 상처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돋아난다. 햇빛에 말라가는 듯하면서도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힘이 번진다. 식물은 부상을 입으면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한다고 한다. 그 연한 연두빛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다. 상처는 다시 살아가려는 몸의 의지다.
상처와 회복, 절망과 희망은 생명의 그림자와 빛이다. 내 가슴의 횅한 그늘도 하나의 기억으로 머물 뿐이다. 모두 삶의 한 부분이라는 듯 하얀 상처는 말없이 속삭인다.
“상처는 치유의 시작입니다. 빛이 있는 한 살아갈 수 있지요.”
<
홍용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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