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이상래 미라클랜드 침례교회 담임 목사
▶ 어린이·대학생 목장 통한 차세대 영혼구원도 힘써, 가정예배로 신앙의 유산… 아들 목회자의 길 준비
와병중, 코로나 사태 속에서 선교사들 돕기에 최선
고 이상래 목사는 한평생을 자신의 교회를 섬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 아프리카, 파마나, 멕시코 등 전 세계 선교에 헌신했다고 가족과 성도들은 회고했다.
“남편은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아프리카, 파나마 등 전 세계 선교를 통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지난 8월19일 58세의 나이에 신장암으로 별세한 이상래(사진) 미라클랜드 침례교회 담임목사의 부인 이(민)혜정 사모는 “처음 이민목회를 시작했을 때 이목사는 어려운 경제형편에도 불구하고 돌반지를 팔아서라도 선교비에 보태는 열정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상래 목사는 1961년 12월8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부친 이행우, 모친 임항례씨 사이에서 4남매중 막내로 출생했다.
이목사는 고등학생때 가장 친한 친구를 따라 기도원에서 열린 고등부 수련회를 참석해 그곳에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기도를 같이 하다가 성령을 체험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5년 대전 침례신학대학 기독교 교육학과를 졸업한 이목사는 1988년 2월 대전 침례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9~1996년 서울의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시무했다. 이목사는 1992년 3월28일 민혜정 사모와 결혼해 딸 하은과 아들 하형을 낳았다.
민혜정 사모와의 만남은 강남중앙침례교회 사역시절에 초등부 교사로 이상래 목사를 통해 성경공부를 배우던 장모의 자연스러운 연결로 만남이 이어졌고, 당시 아직 대학 3학년이었던 사모와 노총각 이상래 목사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목사 가족은 1996년 8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에서 부사역자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이민와서 시작하게 된 이민목회는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97년 4월 일리노이주 사랑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던 당시, 가난과 외로움의 첫 목회지였던 군부대 지역에서 목회하면서 쌀을 구입하기 어려운 형편 가운데 까마귀의 공급도 경험했다고 한다. 1999년 10월 두번째로 청빙되어 간 세인트루이스 반석침례교회는 한국에서 온 의사, 변호사, 교수 등이 영혼구원을 받고 제자되어 한국이나 타주로 파송되는 열매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목사는 이미 한국에 있을 때인 1992년부터 중국선교에 나서 올해까지도 중국선교를 계속해서 할 정도로 선교에 열정을 보였다. 나라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 그의 선교열정은 1999년에 시작한 파나마 선교를 올해까지 지속할 정도로 꾸준함을 보였다.
2006년 12월에 사이프러스 소재 미라클랜드 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당시 이목사는 밤비행기로 세인트루이스에서 LA에 도착하자마자 몇 시간도 채 자지못한 상태에서 바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할 정도로 선교뿐만 아니라 담임목회에도 열심을 보였다.
이목사는 미라클랜드 침례교회로 청빙되어 오면서 그동안 경험한 모든 것들의 열매가 세계로 지경이 넓혀져 영혼구원 사역을 하게 되었다. 2008년부터 아프리카 사역을 시작해 르완다,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콩고 등 아프리카 오지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목사는 목회뿐 아니라 선교사를 돕는 사역을 30년 가까이 꾸준하게 변함없이 해왔고 한번 시작한 사역은 끝까지 감당한 것으로 교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특히 후배목사들을 위한 지도와 기도에 힘을 써 그에게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간 목사들도 그의 죽음에 못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혜정 사모는 “이 목사는 행복한 가정, 행복한 목회, 세계를 품고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를 도왔고 어린이 목장, 청소년 목장, 대학생 목장을 통한 다음 세대의 영혼구원에 이르기까지 오직 영혼을 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가정에서는 따뜻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자녀들과 어렸을 때부터 매일 가정예배를 함께 드리며 자녀들이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이혜정 사모는 “대학원에 재학중인 아들 하형이는 아버지 이상래 목사처럼 목회자의 길을 가기위해 공부하고 아들 스스로도 목회자가 되는 것을 행복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2010년 8월 미드웨스턴 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과장을 마쳤고 2011년(30대), 2018년(37대), 2019년(38대) 남침례회 남가주 지방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는 멕시코 선교에 뛰어들어 올해까지 멕시코의 빈민촌을 찾아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돕고 선교하는 일에도 힘썼다. 2015년부터 국제가정교회 사역원 동아프리카 선교간사로 봉사했으며 지난해 국제가정교회 사역원 이사로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다방면에 걸쳐서 선교와 단체 봉사활동에 열정을 보였다. 이목사의 다음세대의 영혼구원 사역은 유아교육을 전공한 아내의 20여년간 주일학교 사역을 담은 “두란노 어린이 그림성경 창작 활동북”을 출간하면서 계속해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이혜정 사모는 이목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랑으로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섬겨주셨고, 신장암으로 와병중인 상태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아프리카, 중국, 멕시코에서 들려오는 어려운 선교사의 소식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섬김의 손길을 보내주었다”며 “이목사가 남겨준 유언 ‘이제 시작하면 되요’처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이제 시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 이상래 목사의 유족으로 부인 혜정씨, 딸 하은, 아들 하형이 있다.
추모사 - 박찬관 집사이상래 목사님울 기억하면서
목사님은 삶을 통하여 저희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며, 또한 저희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 부임해 오셔서 부터 강단에서 그 마지막 그 시간까지, 한결같이 사랑의 본이 되셨으며, 목사님의 삶이야 말로 섬김의 그 자체셨습니다.
목사님의 섬김은 저희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만나시는 모든이 에게도 동일 하셨지요. 지방에서 힘들게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에게는 정말 최선을 다하셔서 섬기셨습니다. 특히 목회자 컨퍼런스가 저희교회 에서 열릴 때에는, 지방에서 오신 목사님들을 모시고는 짜장면으로, 떡볶이로, 밤 늦은 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야식을 대접하는 일을, 정말 기쁨으로 섬기셨지요.
시시때때로 찾아오시는 선교사님들에게는 며칠씩이나 시간을 내셔서, 아주 특별대우로 극진히 대접하시며, 말들어주는 동무가 되셔서 선교사님들이 새 힘을 얻어 선교지로 돌아가도록 정성껏 섬기셨던, 정말 착하신, 우리 목사님. 목사님은 진정 섬김의 챔피언이십니다.
아프신 중에도, 팬데믹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성도의 가정들을 일일이 챙기시며 도우셨습니다. 새벽시간 마다 전 교인의 기도제목이 적힌 기도 노트를 보시며, 저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지요. 저희와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기뻐 해주시던 우리 목사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연약한 저희들을 세우시며,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셨지요. 때로는 실수할지라도 격려하시며 기도로 후원해 주셨습니다.
이상래 목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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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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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적인 봉사를 하신 분에 대한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