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언젠가 필요할 거야.”
집을 정리하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말을 한다. 창고 한쪽에 놓인 상자, 옷장 맨 위에 올려둔 박스, 침대 밑 깊숙이 밀어 넣은 짐들…… 몇 년 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상자를 ‘언젠가는 상자’라고 부른다.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서.
언젠가는 아이가 찾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언젠가’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아니 오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다가 포기하고 만다. 상자는 그대로 남아 있고, 또 다른 상자를 만들어 그 위에 올려놓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 안에는 “언젠가는 상자’는 더 많이 쌓여 간다.
사람들은 정리를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리 란 물건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추억이다.
한 가정의 옷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옷들을 발견했다. 몇 년째 입지 않았고 앞으로도 입을 일이 거의 없지만, 선뜻 정리하지 못하는 고객의 마음이 보였다. 늘 그랬듯이 사람들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에 담겨진 기억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의 집이라도 이런 물건들이 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그려서 건네준 작은 그림 편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함께 들고 온 낡은 이민가방들.
유행 지나고, 사이즈가 변한 양복과 비싸게 주고 산 옷들과 핸드백.
그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시절의 내가 보인다. 부족했지만 서로를 더 많이 의지했고, 힘들었지만 함께 웃을 이유가 많았던 시간들이다. 그래서 쉽게 버리지 못한다.
특히 이민 가정에서는 물건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하나 둘 장만했던 살림살이에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고, 아이들을 잘 키워 보겠다는 부모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몇 달을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하나를 버리기에 아쉬움이 앞선다.
“혹시 나중에 필요할지 몰라. 아직 멀쩡한데.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이 말은 습관이 아니라 삶의 추억들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할 때 누군가에게 “그냥 버리세요.” 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그 물건은 한 사람의 세월이며, 추억이며, 가족을 향한 사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녀들의 물건이다.
자녀들이 독립한 뒤에도 많은 부모는 자녀 방을 그대로 남겨 둔다. 옷장에는 학창 시절 입던 옷이 그대로 걸려 있고, 책장에는 오래된 교과서가 꽂혀 있다. 서랍을 열면 운동회 메달과 색이 바랜 편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부모는 그 물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어린 시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공간 정리를 도와드렸던 한 어머니가 있었다. 결혼한 지 오래된 아들 방을 그대로 두었기에 정리를 시작하려는 데 “혹시 애가 와서 찾으면 어떡하죠?” 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며칠 뒤 아들이 집에 와서 “어머니 이제 제 물건은 정리하셔도 돼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물건을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니라, 네 어린 시절을 붙잡고 있었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우리는 종종 추억이 물건 속에 담겨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추억이 물건 안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아이가 처음 걸었던 날의 감동은 작은 신발을 버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결혼식의 기쁨은 웨딩드레스를 간직해야만 남는 것 또한 아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오래된 밥그릇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이미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물건을 버린다고 해서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간이 비워질수록 기억은 더 따뜻하고 선명하게 남는다.
나는 정리를 시작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물건은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 아니면 과거에만 머물게 하는가?
그 질문 하나가 정리의 기준이 된다. 비움은 잃는 일이 아니다. 비움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일이다.
집 안을 가득 채운 물건을 조금씩 놓아줄수록 빈 자리가 생긴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생기고, 바닥에 앉아 스트레칭 할 공간이 생긴다. 오래 미뤄 두었던 책 한 권을 펼칠 여유가 생기고, 창가에 앉아 아무 말없이 풍경을 바라볼 마음의 넉넉함이 생긴다.
삶에서 가장 귀한 것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정리는 집을 넓히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가볍게 만드는 지혜이다.
그리고 비움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언젠가는 상자’ 하나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물건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갈 여유로운 공간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행복은 더 많이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남겨 두고 여유로운 공간속에서 평안한 마음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다음 글에서는 ‘추억은 마음에 남기고, 물건은 감사한 마음으로 놓아주자.’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 추억은 마음속에, 비워진 공간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을 선물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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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공간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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