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 고운 기억이 머무는 공간
▶ 박완서의‘싱아’가 살던 집
지난주 우리가 천경자의 색채를 통해 삶의 뜨거운 에너지를 확인했다면, 이번 주에는 그 뜨거움을 잠시 식혀줄 조용하고도 따스한 그늘로 자리를 옮겨보려 한다. 우리 문학의 영원한 어머니, 박완서 작가의 공간이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개풍 박적골의 자연과 서울 현저동 산동네의 치열한 삶을 마치 한 편의 풍경화처럼 마주하게 된다. 세상이 정해놓은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살아낸 고단한 시간을 오롯이 자신만이 소유한 문학으로 지어 올린 그녀의 삶은 늘 내게 깊은 묵직함과 안도감을 안겨준다. 가장 평범한 일상과 단단한 내면으로 삶의 비극을 다정하게 감싸 안은 예술가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예술을 삶으로 승화시킨 <나목>
1970년 그녀가 세상에 처음 선보인 소설<나목>은 전쟁의 참혹한 시대를 관통하며 피어난 한 예술가 바로 박수근 화가의 삶을 소설로 완성했다. 가난한 화가의 삶을 예술로 보듬어 안은 그 첫걸음 박완서에게 글쓰기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짓밟힌 일상과 예술가의 영혼을 진실하게 구원해 낸 숭고한 짓기의 행위였다.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세월의 결을 문장으로 풀어낸 그녀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매일 숨 쉬는 공간을 떠올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의 중단이 아니라 세월의 겹이 켜켜이 쌓여가는 이어짐의 연속이다.
소설 속 작가의 유년기를 지배하는 것은 완고하면서도 정갈한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사랑방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던 묵직한 고가구들은 어린 완서에게 세상의 질서를 가르쳐준 첫 번째 ‘공간’이었다. 작가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나무의 결 하나, 문창살의 격자무늬 하나에도 선비의 기품이 서려 있었음을 고백했다.
인테리어에서 ‘오래된 것’은 단순히 낡은 물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박완서식 미학은 시간을 견딘 것들에 대한 예우에 가깝다. 집안 어딘가에 대물림받은 낡은 소반 하나, 혹은 십수 년을 함께한 목재 의자가 있다면 그것을 공간의 주인공으로 두어보자. 억지로 광을 내지 않아도 세월이 빚어낸 나무의 결은 그 어떤 고가의 오브제보다 멋진 세월의 깊은 공간을 선사해 줄 것이다.
■어머니의 바느질과 ‘입는‘ 공간의 철학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작가의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입혔던 옷들에 대한 묘사다. 서울로 상경한 고단한 삶 속에서도 어머니는 딸에게는 최고급 옷감을 끊어 정성껏 옷을 지어 입혔다. 남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이자, 삶을 대하는 꼿꼿한 태도였다. 말년에 작가가 머물던 구리 아치울의 ‘노란 집’은 소설 속 기억들이 정제되어 완성된 공간이다. 작가는 노란 집 거실에 앉아 마당의 꽃나무들이 계절을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보길 즐겼다. 그에게 창은 자연이라는 예술 작품을 집 안으로 들여오는 ‘살아있는 액자’였다.
패션 칼럼니스트로서 나는 이 대목에서 집과 옷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옷이 ‘내 몸이 머무는 가장 작은 집’이라면, 인테리어는 ‘내가 입는 가장 큰 옷’이다. 작가의 어머니가 정갈한 바느질로 딸의 기품을 세워주었듯, 우리도 우리를 감싸는 공간의 질감을 세밀하게 골라야 한다. 거친 린넨의 서늘함, 잘 다려진 면 소재의 쾌적함, 혹은 어머니의 손때 묻은 바느질감을 닮은 자수 소품들, 이런 요소들이 모여 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완성한다.
박완서 작가는 생전 “그저 소박하고 정갈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소박함은 결핍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걷어낸 뒤에 남는 ‘충만한 단순함’이다. 식탁 위에 놓인 정갈한 옹기그릇 하나, 정성껏 다려진 면보가 깔린 찻상, 요란한 장식 없이도 주인의 단정한 마음씨가 읽히는 집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박완서의 문학에서 배워야 할 라이프스타일의 정수다.
■모시의 깃을 세우듯 정갈한 패션과 시원한 여백의 공간
그녀가 남긴 단단한 결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입는 옷과 거주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편안하게 몸을 감싸는 린넨위에 서늘하게 빳빳한 모시 재킷의 깃을 툭 세워 올리는 행위,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고 내 삶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정갈한 포인트이자 선언이 된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슬픔과 고독을 가리기 위해 인위적인 장식을 채워 넣은 대신 창가에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지나갈 여백을 남겨둔다. 햇살을 투과시키는 단정한 모시 커튼 하나, 군더더기 없는 선이 살아있는 나무 가구, 외로움을 가리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시원하고 서늘한 여백 속에서 내 공간은 비로소 삶의 흔적을 흡수하며 깊은 예술로 승화된다.
집은 사는 사람의 기억을 먹고 자란다. 작가의 <노란 집>에서 말한 ‘지붕 아래 스며든 노란빛처럼 그 공간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삶의 다정함과 그리움을 차곡차곡 품어내고 있었다‘의 구절이 작가의 영혼을 형성했듯, 우리가 머무는 공간 역시 나만의 역사로 채워져야 한다. 오늘 당신의 거실을 한 번 둘러보자.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거나, 나를 꼿꼿하게 지탱해 줄 소중한 물건이 있는지. 만약 없다면, 이번 주말엔 작가의 소설 한 권을 들고 오래된 나무 탁자 앞에 앉아보길 권한다. 그곳에서 당신의 삶도 한층 더 정갈하고 우아하게 여물어갈 것이다.
결국, 삶을 예술로 짓는다는 것은, 내 삶에 밀려드는 고통과 나이 듦을 외면하지 않고 내 고뇌와 삶의 태도로 정갈하게 풀어내는 일이다. 1회 천경자 화백이 격정적인 색채와 불꽃 같은 생명력으로 공간을 채웠다면, 박완서 작가는 모시처럼 빳빳하고 정갈한 선으로 삶의 거친 상처를 우아하게 다듬고 비움과 정갈함이라는 단단한 여백으로 공간을 승화시킨다. 두 거장이 도달한 지점은 결국 하나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삶의 아픔이나 외로움에 꺾이지 않고 내 삶과 공간을 더욱 단정하고 꼿꼿하게 지어나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잎을 다 떨군 겨울나무가 도리어 가장 아름다운 뼈대를 드러내듯, 우리 역시 타인의 시선이나 번잡함에서 벗어나 내 집의 작은 계단 하나를 쓸어내리며 하루를 즐기자. 나이가 들수록 더욱 밝고 정갈하게 내 삶의 아픔마저 아름다운 공간의 결로 지어 나갈 때 나의 일상 역시 비로소 단 하나뿐인 위대한 예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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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패션 칼럼니스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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