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투자 과잉인가?
▶ 미국, 남북전쟁 후 인프라 건설 붐 일자 철도 회사들 철도·장비로 ‘담보 금융’
▶ 투자 속도가 실제 수요 앞질러 ‘거품’
▶ 21세기 초에는 통신버블로 경제 휘청
▶ 빅테크들, 데이터센터 건설 자금 위해 GPU 담보로 수천억달러 회사채 발행
▶ 채권왕 건들락 “시장 과열 신호” 경고
19일 코스피는 개장 직후 6% 넘게 무너지며 6,400선까지 밀렸습니다. 방아쇠는 기업 실적도 지정학도 아닌 채권시장이 당겼습니다. 미국 장기국채 금리가 뛰자 세계 증시가 흔들린 것입니다. 그 금리를 밀어올린 용의자로 지목된 건 다름 아닌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였습니다. 빅테크들이 데이터센터 건설 자금을 대려고 쏟아낸 2,000억 달러가 넘는 장기 회사채가 시중 장기 자금을 빨아들여 국채 수요를 위축시켰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월가를 비롯한 금융 전문가들에게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과거 운하·철도·전기화·닷컴·AI의 투자 궤적을 비교하면서, 현재 AI 투자의 규모와 속도가 과거 기술 투자 열풍(붐)과 닮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세계 대공황 연구로 퓰리처상을 받은 리아콰드 아메드는 최근 미 포천지 기고문을 통해 “민간 자본이 미국 철도라는 혁신적인 인프라 기술에 쏟아지던 마지막 시기를 연구했기에, 오늘날 AI 구축 과정을 보면서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산업의 투자 열풍이 신용시장의 거품으로 번지는 지점. 월가가 150년 전 철도 혁명 당시 자본 흐름을 다시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미래의 운임을 먼저 판 ‘철도 투자열풍’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미국은 철도에 미쳐 있었습니다. 1869년 완공된 최초의 대륙횡단철도를 계기로 인프라 건설 열풍이 불었고, 7년 만에 철도망은 3만5,000마일(약 5만6,320㎞)에서 7만 마일(약 11만2,654㎞)이 돼 두 배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노선 전체가 완공되기 전엔 충분한 운임 수입을 내기 어려웠습니다. 기술의 미래는 모두가 믿는데, 그 미래가 도착하기 전까지 천문학적 건설비를 누군가는 계속 대야 했습니다.
미국 철도회사들이 ‘담보 금융’을 생각해냈습니다. 선로와 토지를 담보로 한 채권을 찍고 이자를 지급합니다. 기관차와 관련 장비 소유권을 묶은 신탁으로 돈을 빌립니다. 그렇게 펜실베이니아 철도공사는 철도 구간을 담보로 설정해 채권 순위를 매겨 돈을 빌렸고, 필라델피아의 철도회사는 기관차를 담보로 장비 업체의 부품을 사들였습니다.
회사가 망해도 물리적 자산에 가치가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오늘날 엔비디아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담보로 보험사와 연기금의 돈으로 데이터센터와 AI업체에 대출을 내주겠다는 구상과 닮았습니다.
그런데 붐이 달아오르자 담보 목록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868년 한 중서부 철도는 같은 노선에 1순위·2순위 모기지 채권을 겹겹이 발행해 건설비를 치렀습니다. 미국 북부 대륙횡단 철도회사였던 노던퍼시픽의 채권은 한술 더 떠, 아직 깔리지도 않은 선로와 완공해야 받을 수 있는 연방 토지까지 담보로 잡았습니다. 존재하는 자산이 아니라 ‘미래’가 담보로 잡힌 겁니다. 그런데도 채권은 팔렸습니다. 남북전쟁 국채를 대중에게 팔아 이름을 날린 금융업자 제이 쿡이 이 담보 채권을 미국과 유럽의 저축자들에게 대량으로 유통시켰고, 담보에 대한 믿음이 채권 가격을 지탱하고 그 채권이 건설을 지탱하는 순환이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건설 속도가 실제 수요보다 앞서면서 투자 수익률은 곤두박질쳤습니다. 투자자들은 채권을 내다 팔고 철도 투자를 중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채권이 팔리지 않자 제이쿡앤드컴퍼니는 파산했습니다. 철도의 자금력을 상징하는 쿡의 은행이 파산하자 1873년 9월 증시는 폭락하고 철도회사는 줄도산했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사상 처음 열흘간 문을 닫았고, 최소 100개 은행도 무너졌습니다.
“장비 살 돈도 빌려드려요”…순환금융 닮은 IT 투자 열풍
한 세기가 지나 인터넷이 등장하자 같은 문제가 반복됐습니다. 인터넷을 연결하는 통신망인 광섬유망을 먼저 깔아야 하는데 신생 통신사들에겐 돈이 없었죠. 이번에 돈줄을 만든 것은 장비 판매자였습니다. 루슨트와 노텔은 자기 장비를 사려는 통신사에 직접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섰습니다. 루슨트는 1998 회계연도 연차보고서에서 일부 시장에선 금융을 제공하는 능력 자체가 수주의 조건이 됐다고 밝혔습니다. 상승기엔 놀라운 힘을 냈지만, 통신사 매출이 기대만큼 늘지 않자 손실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돈을 빌렸던 고객은 주로 매출이 거의 없는 신생 통신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본시장 돈과 벤더 금융으로 앞다퉈 같은 구간에 광섬유를 깔았죠. 상승기엔 모두가 이겼습니다. 통신사는 망을 얻고, 장비업체는 매출을 찍고, 주가는 올랐습니다. 그러나 2001년 초 자본시장이 얼어붙자 수십 개 신생 통신사의 돈줄이 몇 달 만에 동시에 끊겼고, 2000~2003년 20개가 넘는 사업자가 미국에서 파산했습니다.
고객이 쓰러지자 장비 주문이 끊기고, 빌려준 돈도 함께 부실해졌습니다. 루슨트는 2002년 연차보고서에서 매출채권과 고객금융을 상각하거나 헐값에 팔아야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수주의 조건이라던 금융이 4년 만에 리스크가 된 것입니다. 인터넷은 세상을 바꿨고 땅속의 광섬유는 남아 이후 20년을 떠받쳤지만, 그 망에 투자한 회사들은 무너졌습니다.
철도 시대 ‘담보 금융’과 IT 시대 ‘순환 금융’ 섞은 AI 붐
2026년 AI는 철도의 자산담보 금융과 정보기술(IT)업계 순환금융을 결합했습니다. 올해 3월 AI 클라우드업체 코어위브는 GPU가 포함된 인프라와 고객계약을 담보로 받은 85억 달러 대출로 무디스의 첫 투자등급을 받았습니다. 엔비디아의 5,000억 달러 플랫폼은 이 시장에 연기금 돈까지 끌어들이려 합니다. 동시에 엔비디아·AMD·오라클은 오픈AI에 투자와 보증, 장기계약을 제공하며 자사 매출로 되돌아오는 순환 고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AMD는 오픈AI에 자사 주식을 살 권리(워런트)를 주는 대가로 자사 GPU 도입을 약속받았고, 오라클은 3,000억 달러 규모의 컴퓨팅 계약을 맺었죠. 여기서 매출의 착시가 생깁니다.
AI 기업이 스스로 번 돈으로 GPU를 사는 것과 공급자가 대준 돈으로 사는 것은, 매출 숫자만 보면 똑같습니다. 그러나 담보 대출이나 보증을 받아 남의 돈으로 살 경우, 순환의 방향이 바뀌면 위험이 커집니다. AI가 기대만큼 돈을 못 번다는 신호가 오면, 담보인 GPU 가치가 떨어져 대출이 줄고, 주문이 줄어 공급자 실적이 꺾이고, 투자·보증까지 한 공급자는 매출 둔화와 신용손실을 동시에 맞습니다. 1873년의 철도 채권과 2002년의 루슨트가 걸었던 길입니다. ‘채권왕’이라 불리는 제프 건들락은 엑스(X)에 AI칩을 장기부채의 담보로 삼는 금융 상품의 등장이 “시장 과열의 신호”라고 비판했죠.
물론 과거와 다른 점도 있습니다. AI 투자를 주도하는 빅테크들은 과거의 철도·통신사와 달리 세계 최대 현금을 쓸어담는 기업들이고, BIS도 AI의 잠재력 자체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현금이 부족한 AI랩과 데이터센터, 신생 클라우드 업체는 취약한 지점입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돈이 커질수록, 빅테크·엔비디아·월가를 잇는 보증과 계약망도 함께 커집니다. 여기에 엔비디아 GPU에 들어갈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납품하는 한국도 미국 금융시장의 AI 신용 사이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담보의 수명은 과거보다 불리합니다. 철도는 망해도 선로가 남고 광섬유는 땅속에 남았지만, AI칩은 몇 년마다 신제품으로 교체됩니다. 빚을 갚을 현금 흐름과 빚을 지키는 담보 가격이 같은 AI 사이클에 묶여 있는 셈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술혁명은 종종 그 혁명에 돈을 댄 투자자들을 파괴했습니다. 150년 전 사람들은 철도의 미래를 물었고, 그 답은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1873년 시장은 붕괴했습니다. 기술에 대한 답은 맞았지만, 금융에 대한 질문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물어야 할 것도 AI가 얼마나 위대한 기술인가가 아닙니다. AI가 버는 돈의 속도와 AI를 믿고 들어오는 돈의 속도 중 어느 쪽이 더 빠른가. 19일의 시장은 이 질문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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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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