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7일은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165번째 생일이었다.
사망한지 115년째를 맞는다. 한국은1999년부터 부천필하모닉에 의해 말러의 교향곡 전곡이 연주된 뒤 말러 붐이 계속 되고 있다. 올해도 서울 시향을 비롯 KBS 교향악단, 인천 시향, 부산 시향 등이 앞다투어 말러 교향곡들을 연주한다. 그러면 왜 말러인가? 말러의 교향곡들이 한국인들의 기호에 맞는 ‘Sad’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러에 대해 평론가들은 말러의 음악이 현대인의 상처를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현대인들은 행복하지 않고, 사람들이 말러를 좋아하는 것은 마음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그럴까?
말러의 음악들이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오토’ 처럼 분명 ‘Sad’한 일면이 있긴 하지만 말러의 음악들이 모두 현대인들의 상처를 대변하고 있다고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성급한 결론일지 모른다. 교향곡 1번(거인), 2번(부활) 등은 4악장에서 거대한 승리의 팡파르가 울려퍼지며 ‘부활’에서도 압도적인 부활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3번이나 4번도 ‘뿔피리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척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문제는 5번인데 특히 4악장의 ‘아다지오토’가 너무 비통하기 때문에 마치 이것이 말러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오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아다지오토’ 조차도 슬픈 음악이라기 보다는 원래는 아내 알마에게 보내진 음악적 연애편지였다고 한다. 즉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뿐이었지만 말러처럼 섬세한 인격에 있어서 그리움이란 슬픈 연민의 감정이기도 하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어찌보면 매우 아름답고 감상적인 작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것을 말러 붐을 일으킨 장본인 (뉴욕 필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로버트 케네디 암살 당시 추모음악으로 쓴 것이 슬픈 음악의 대명사처럼 돌변해 버렸다.
말러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 자생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다면 매우 매력적이고 뛰어난 작곡가의 한 명으로 클래식을 좋아하는 찐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을 작곡가였다. 그런데 말러붐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죄다 유태인 지휘자였던 것이 말러가 마치 홀로코스트의 대변자, 비극의 예언자로 취급받게 된 이유가 되고 말았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실제로 “말러야말로 20세기의 정신적 분열을 예견한 예언자이며 교향곡을 통해 20세기의 홀로코스트와 조성의 붕괴를 미리 내다본 작곡가였다”고 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지휘자였던 마이클 틸슨 토마스 역시 유태계 지휘자로서 말러에만 집착하다 끝내 관객들에게 외면 당했다.
말러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작곡가로서는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꿋꿋하게 자신의 예술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후대의 유태계 지휘자들은 말러가 마치 청중들에게 끝내 외면 당한 불우한 천재로서 자신들이 당한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말러에게도 십자가처럼 뒤집어 씌워 대리만족을 얻는 민족주의자로 변모시켜 버리고 말았다. 사실 말러는 유태인들이 가장 증오해마지않는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그의 음악은 바그너에게서 나왔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부분 바그너를 답습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만큼은 말러가 누구였든 말러의 본질이 Sad 한 요소가 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길이 없다. 알마에게 사랑을 고백한 연서치고는 이 음악은 지나치게 침통했으며 마치 실연당한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 처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것이 말러가 말하는 사랑이며 인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곡 하나 때문에 말러의 이미지는 (실제로도 말러는 알마에게 버림받고 그의 딸도 5세를 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비극의 주체자로 각인되고 만다. 말러가 정말 ‘아다지에토’에 어울리는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작곡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다지에토’만큼은 인생에 대한 고뇌, 슬픔, 회한 등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실존적 허무주의로 가득했다.
아다지에토(Adagietto)는 아다지오보다는 조금 빠른 형식으로 주로 격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말러의 교향곡에서는 현악기와 하프로만 연주되어 더욱 처연하게 들려온다. 1971년의 ‘베니스에서 죽다’라는 영화의 테마 곡으로 사용되어 유명해졌고 이밖에 한국의 드라마, 영화(헤어질 결심) 등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